외교부는 지난 3월 28일 생산 후 30년이 경과한 비밀 해제 외교문서 총 2,506권 38만여 쪽을 공개했다. 해당 문서에는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급변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각국의 정보수집과 북한 정세 전망, 대북 외교 설정, 주변국 반응 등을 엿볼 수 있다. 북한 측은 김일성이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사망했다는 사실을 7월 9일 정오에 발표했다. 북한 내부 동향으로는 평양방송과 중앙방송이 하루 만에 사망 사실을 발표하고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계속 강조하면서 관련 내용을 지속적으로 방송한 것으로 기록됐다. 우리 정부는 당시 외무차관을 중심으로 비상대책반을 구성하고 전 공관 비상근무 체재에 돌입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9일 전군 비상 경계 태세를 지시하고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1948년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내각수상과 국가주석으로 권력을 독점해 개인숭배체제를 구축했으며, 6·25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공고하게 한 인물이다. 평남 대동군 출생으로 본명은 김성주이다.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내각수상, 인민군 최고사령관을 맡고, 원수 칭호까지 썼던 인물로 중앙인민위원회 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 최고위직을 역임하였다. 북한의 국가주석을 유임하였다.
소련군의 지원에 힘입어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은 북한 사회에 1인 숭배에 기초한 매우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당의 지배를 내세운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혈통의 지배를 내세우며,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여 매우 기형적이고 봉건적인 유사-왕조체제를 만들었다.
1991년 9월에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고, 1994년에는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한국경제에 따르면 김일성 사망 당시 북한은 김일성이 심장혈관 이상과 동맥경화, 심신 과로 등으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일성의 사망 배경에 대해서는 각국의 의견이 갈렸다. 주 루마니아 대사관은 김일성의 사망이 남북 정상회담 준비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파악된다고 보고했다. 중국은 김일성의 사망이 자연사라고 단정했다. 한편 러시아는 타살 가능성을 언급했다. 당시 주중 러시아 대사관 참사관은 김하중 주중 한국 대사관 공사에게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남북 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김일성 주석의 사망을 촉진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라고 했다. 게오르기 미토프 전 주한불가리아 대사대리도 “김일성이 자연사했다고 믿지 않는다”라고 했다. 나이지리아 주재 북한대사관 등이 사망 다음날 분향소를 설치해 조문객을 받은 반면 일부 공관은 사망 사실을 모르고 있는 곳도 있을 만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에 사전 대비를 하지 못한 사정을 가늠된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 사실이 확인되자 각국 북한대사관은 김 주석 사망 후에 분향소를 설치해 조문객을 받는 동시에 조문을 강하게 요청했다고 했다.
베트남, 헝가리, 불가리아, 독일 등 평양 주재 외국공관들로부터 입수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 후에도 평양 시내는 조용하고 특이한 동향은 감지되지 않았지만, 북한 측은 7월 11일 평양 주재 외교단 전원을 주석궁으로 초치해 조문록에 서명하도록 하고 김정일은 외교단에 감사하다는 말만 전달한 것으로 우리 정부는 파악했다.
당시 우리 외무부는 북한에 공관을 둔 국가에 주재하는 대사관에 평양 주재 공관을 통해 입수된 북한 동정을 파악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김일성의 사망으로 북한 측이 남북정상회담 연기를 통보하자, 한미 정상은 7월 15일 전화통화를 갖고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는 계속 유효하다는 원칙 아래 대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기 위해 동서독 정상회담 참석자, 행사사례, 공동 선언문 등 관련 자료를 수집 분석하며 실무진 접촉에 이어 고위급 협의를 준비했지만 김일성 주석의 사망 사흘 뒤인 1994년 7월 11일 북한의 남북최고위급회담 연기 통보로 정상회담은 결국 취소되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한국과 계속 긴밀한 협조체제 유지를 강조했다.
한편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동결을 대가로 경제 협력을 약속한 첫 북핵 합의인 1994년 제네바 합의가 무산될 뻔한 위기에 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김일성의 사망 이후 북한 대표단이 돌연 북미3단계 고위급 1차 회담을 중단했다.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직접 조의를 표했고, 북한은 김일성 사망 사흘 만인 7월 11일 1차 회담을 개시했다.
미국은 당시 북한에 완전한 핵확산금지조약(NPT)체재 복귀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사찰 전면 수용. 비핵화 공동 선언 등을 요구했다. 북한은 북미 관계 정상화, 경수로 지원,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 불사용 보장 등을 조건으로 내밀었다.
뉴시스에 따르면 당시 우리 외무부는 1994년 8월 5일자 김일성 사후 한반도 정세에 관한 보고서에서, 북한 권력 승계는 김정일 체제를 굳혀 가는 과정이라고 평가하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주변국들도 실리 추구 입장에서 북한의 안정을 원하는 입장이라고 분석했다.
1994년 10월 북한의 핵동결 대가로 경수로 지원을 골자로 한 북미 제네바 협의가 체결된 후에도 북핵 해결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러시아가 8자 회담을 제안하면서 동북아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발언권 강화를 시도한 사실도 문서에 담겼다. 당시 우리 정부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동북아 전체의 안보협력 증진을 목표로, 다자적 접근 방법은 긍정적으로 검토 가능하다고 내부적으로 평가했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 열람실’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 정부는 국민의 알 권리 보장과 외교 행정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생산된 지 30년이 지난 외교문서를 매년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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