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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관광 후기를 넘어, 이 여행기는 세대와 문화를 잇는 ‘가족 중심 체험여행’의 한 면을 보여준다. 아들과 며느리, 손주가 함께 여행을 통해 한 가족이 어떻게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역사와 예술에 눈을 뜨게 되는지 생생하게 전한다. 특히 고궁박물원에서의 세밀한 해설, 중정기념당과 단수이에서의 역사적 성찰, 지우펀과 스펀 등에서의 정감 어린 관찰은 독자에게 타이완이라는 공간의 다층적인 매력을 소개함과 동시에,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가족애와 세대 간 배려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가족과 함께한 느린 걸음,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시선을 공유하고자 본 여행기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20025. 5.30. 청주공항으로 향하는 마음은 마냥 설렜다. 가보고 싶던 나라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타이완.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뒤로 미뤘던 여행지다. 이번 여행은 아들, 며느리, 손주와 우리 부부가 함께 하는 여행이라 더욱 기대되었다. 이번 여행의 기획 및 세세한 안내는 고맙게도 며느리가 맡았다.
여행 1일차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하늘을 날았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구름과 바다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비행기는 무사히 타이완의 수도 타이베이에 안착했다. 기온과 습도가 아주 높을 거라는 우려와는 달리, 선선한 바람이 부는 쾌적한 날씨였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날까지 비가 오고 난 뒤라서 그럴 거라고 우리는 입을 모았다. 복 받았다는 말도 했다. 타이베이역에서 기차를 탄 우리는 숙소가 있는 시먼역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모두의 시선이 창 밖을 향했다. 출입구 상단에는 역의 이름을 영어와 중국어 번체자로 안내하고 있었는데 평소 한자 정자체에 익숙한 나와 아내는 편하게 역 이름이 들어왔다.
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평소 가리는 것이 많은 아내와 아들을 위해, 며느리는 사천 음식을 하는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며느리는 영어로 아무런 불편함 없이 소통하며 음식을 시켰다. 며느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들은 "나 장가 잘 들었지?"하며 싱긋 웃는다. 우리 부부도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택시로 101타워를 향했다.
2004년 12월 말 완공된 타이베이 101 빌딩은 지난 2010년 1월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높이 509.2m(지상 105층)의 이 빌딩은 요즘도 세계 9번째로 높은 건물로 알려져 있다. 전망대를 오르며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매우 빠른 것에 놀랐다. 5층 매표소에서부터 89층 전망대까지 단 37초 만에 오르는 엘리베이터는 세계 최고속 엘리베이터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고 한다. 타이완의 건축가 리쭈위엔이 설계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삼성물산이 건설한 빌딩이라고 하니 더욱 친근감이 들었다. 대나무 모양을 닮은 타이베이 101은 숫자 ‘8’이 번영과 성장을 뜻하는 ‘발(發)’과 발음이 비슷하여 좋은 숫자로 여기는데, 이를 반영해 8층씩 8단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손주를 중심으로 89층 전망대에서 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타이베이의 밤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손주도 피곤하지도 않은지 열심히 다니며 여기저기 살펴보곤 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여행 2일차 우리 일행은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타이베이 도시철도인 MRT를 이용해 국립 중정기념당으로 향했다. 기념당은 중정기념당 역 5번 출구와 바로 연결되었다. 자유광장이라 새겨진 웅장한 명나라 양식의 정문을 들어서면 쌍둥이 같은 주황색 기와 건물이 보였다. 왼쪽은 국가음악청, 오른쪽은 국가희극원으로 이곳에서는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중정기념당은 중국의 산해혁명 이후 쑨원(손문)과 함께 자유중wptm국을 수립하고자 노력했던 장제스(장개석)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장제스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독립을 위한 활동을 지원한 공로로 우리나라로부터 1953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기도 하였다. 파란 기와를 머리에 얹은 높이 70m의 웅장한 중전기념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모두 89개로 장제스 서거 당시의 나이를 뜻한다고 한다. 무게 25톤의 거대한 장제스 동상이 있는 중정기념당에서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장제스의 신조를 되새기며 기념 사진을 찍었다. 기념당 앞 마당에는 정시마다 근위병 교대식이 있는데 매우 절도 있어 지켜보는 관광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중정기념당 전시실에는 장제스를 기념하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와 함께 1947년 2월 28일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기록물도 보관되어 있었다. 세계대전 이후 타이완 정부가 국민들을 상대로 억압, 폭력 정책을 펼쳤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는데 90년대에 와서야 정부가 국민에게 사과하고 ‘화평기념일’이라는 공휴일을 두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 역시 이와 비슷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중정기념당 관람을 마친 우리 일행은 근처 식당에서 우육면 등으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스펀으로 향했다. 스펀에는 닭날개 볶음밥 집 등 길거리 음식점이 즐비했다. 택시 기사의 안내로 가용 엄마 천등가게로 갔다. 그곳에서는 천등에 소원을 비는 글씨를 쓰고 가게 바로 앞 철길에서 천등을 하늘로 띄우는 광경이 목격되었다. 얼마뒤 좁은 철길로 기차가 지나갔다. 기차가 지나가자마자 주변에 줄지어 있는 천등가게에 있던 손님과 종사자들이 다시 철길 위로 나와 소원을 빌며 천등을 날리기에 바빴다. 일본인도 있고, 한국인도 있고, 서양인도 더러 섞여 있었다.
우리는 야경 명소로 알려진 지우펀으로 바쁜 걸음을 내딛었다. 지우펀에는 먹거리를 판매하는 매장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어 바싹 긴장하며 한걸음 한걸음을 옮겼다. 우리 일행은 귀국 선물로 사기 위해 누가크래커 맛집을 찾아 좁고 오래된 거리를 끝없이 걸었다. 그리고 절벽 위에 세워진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시켜먹었다. 아내는 입에 맞는 음식이 없다더니 별안간 고추장을 꺼내 밥에 비비는 거였다. 한국 집에 있을 때 외국에 나가면 반드시 그곳 음식에 적응하겠노라고 큰 소리치던 아내는 그날 밤 호텔에 돌아와 기어코 근처 수퍼마켓에서 발견한 신라면(컵라면)을 아들과 함께 끓여 먹으며 행복해했다.
여행 3일차 설레는 마음으로 대만 꾸공보우위엔(고궁박물원)을 찾았다. 우리 일행은 1층 쑨원(손문) 선생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도슨트를 기다렸다. 엄청난 양의 유물을 도슨트의 안내 없이 둘러보기만 해서는 큰 의미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일행 중 유치원에 다니는 손녀는 2시간이나 걸리는 도슨트의 안내를 견뎌내기 힘들 것 같아 1,2,3 층의 박물관과 주변 풍광을 며느리와 함께 둘러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아내와 나, 아들이 도슨트의 안내를 받으며 박물관 구석구석을 살피느라 부지런을 떨었다.
‘고궁박물원’에서 ‘고궁’은 옛 궁궐을 의미하고 ‘원(阮)’은 박물관에서 ‘관’ 자 대신 쓰인 글자로 격식을 갖추어 쓴 것이라 한다. 대만 국립 고궁박물원은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함께 세계 4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박물관이라 한다. 고궁박물원은 엄청난 양의 진귀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고, 유물의 대부분은 중국 대륙의 상나라, 주나라는 물론 송, 원, 명,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니 가히 세계 4대 박물관에 들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완이라는 작은 섬(우리나라의 경상남북도 정도의 크기)나라에 어떻게 엄청난 양의 중국 대륙의 유물이 있을까? 그것은 중국의 국공 내전으로 장제스 총통이 이끄는 국민당 군대가 모택동 군대에게 밀려 1948년 정부를 타이완으로 옮겨오면서, 중국의 자금성, 난징 등에 있는 유물을 옮겨왔다고 한다. 중국의 자금성과 만리장성을 빼고는 모두 옮겨 왔다는 과장된 말이 떠돌 만큼 국립 고궁박물원에는 무려 70만 점 가까운 많은 유물이 소장되어 있었다. 이 유물들은 3~6개월마다 순환되는데 이 유물들을 다 둘러보려면 20년은 걸릴 것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라 한다.
도슨트는 이 박물관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유물로 먼저 모공정(毛公鼎)을 들었다. 이것은 중국 청동기 시절을 대표하는 유물로 소주시대 솥으로 알려져 있다. 청동기 유물의 가치를 따질 때는 유물에 새겨진 글잣수가 얼마나 되느냐를 중요한 기준으로 한다고 한다고 하는데, 이 모공정에는 주나라 주왕이 충신 모공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라는 의미로 내려준 500 여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모공정에서 ‘정(鼎)’은 솥을 의미하는 데, 이는 유물 중 그릇에 다리가 달려 있는 유물을 가리키는 말이고, 다리가 달려 있다는 것은 밑에서 불을 땔 수 있는 그릇이라는 의미라고 귀뜸했다.
도슨트가 소개한 눈여겨보아야 할 다른 유물로 옥으로 만든 배추인 추이위바이차이(취옥백채翠玉白菜)를 들었다. 이것은 청나라 시대의 유품으로 옥으로 배추 모양을 정교하게 만든 조각이다. 배추 잎 상단에 다산을 상징하는 메뚜기와 여치를 새겨 넣었는데, 다리까지 섬세하게 새겨 넣어 그 세심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취옥백채는 천연 그대로의 평범한 통옥의 색깔에 맞춰 자연스럽게 배추를 새겨넣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라고 한다. 세로 18.7cm 정도의 작은 크기이지만 그 정교함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장인이 조각한 옥은 최상의 품질의 옥은 아니었다. 단점을 장점으로 승황시켰다고나 할까? 옥의 흰색 부분은 배추의 몸통을 표현했고, 청색 부분은 배춧잎을 형상화 했으며, 반점이 있는 부문은 추위에 얼거나 서리를 맞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그 세심한 표현에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 유품은 처음에는 한 무더기의 영지버섯과 함께 화분에 심어져 있었으나, 뒤에 받침을 제작해 받쳤다고 한다. 이 유품은 박물관이 자랑하는 또 다른 유품인 동파육 등과 함께 외국의 박물관이나, 고궁남원(고궁박물원의 분원으로 타이중 지역에 위치하고 관광객 유치를 위해 6개월 단위로 교차 전시한다고 함)에 출장 나가기도 하는데, 다행히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제 자리에 돌아와 있어 실물을 영접할 기회가 있었다.
다음으로 눈여겨 보아야 할 유물은 앞서 언급한 러우싱스(육형석 六形石)이다. 이 육형석은 안타깝게도 출장 중이어서 실물을 대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육형석에 대한 사진과 설명 이 있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로 5.73cm, 세로 6.6cm, 높이 5.3cm인 이 육형석은 우리에게는 삼겹살 모양의 돌로 유명한 것이다. 간장으로 장시간 우려낸 동파육과 비슷한 모양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소동파가 먹은 고기 모양이라 해서 ‘동파육’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돌은 색을 입히는 가공을 하여 껍질 부분과 고기결이 진짜 고기가 아니냐고 할 정도로 정교했다. 돼지 껍질의 질감까지도 느껴질 정도의 이 육형석을 중국의 황제가 음식상에 일부러 올려 놓고 지인들이 알아보나 못 알아보나를 두고 놀기도 했다는 야사가 전해질 정도로 실제와 거의 같아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관찰한 것은 상야토화쉬에롱원타오쵸(상아투화운룡문투구 象牙透花雲龍紋套球)였다. 이것은 공 속의 공이 무려 17개가 있는 희귀한 유물이다. 겉에서부터 파고 들어가 공 하나를 만들고 그 공을 깎아 그 안에 공을 또 만들어 총 17개의 공을 조각한 작품으로 각각의 공들이 따로따로 자유롭게 회전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러한 기술은 현대 기술로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니 이 유물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이 상아로 만든 공을 완성하기까지 무려 3대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정교한 예술품을 만들다 보니 조작가들이 눈이 멀었다는 말도 전해진다고 하였다.
도슨트가 다음으로 소개한 작품은 띠아오간란허샤오쩌우(조감람핵소주 雕橄欖核小舟)였다. 이 작품은 박물원 수장고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으나 실물을 볼 수는 없었다. 그만큼 박물원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값진 유물이라 한다. 18세기 궁중의 장인 진조장의 작품으로 손톱 크기에 불과한 높이 1.6cm, 길이 3.4cm의 올리브 씨앗에 작은 배를 조각했는데, 창문은 여닫이가 있고 배에 탄 8명 모두의 자세가 다르며 배 안에 소품까지 정밀하게 조각되어 있다고 했다. 배 하단에는 제작일자와 300여 자의 글자가 적혀 있다고 하니 이것이 과연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작품인지 의심할 정도로 정교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다음은 ‘서태후 옥병풍’이었다. 중국인들은 양의 기운이 충만한 옥을 금이나 은 보다 오히려 더 소중히 여길 정도로 매우 아끼고 사랑해서 늘 옥을 몸 가까이 두려고 했다고 한다. 이 서태후 옥병풍은 청
나라 시대 서태후의 거실을 장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옥빛이 영롱하고 섬세한 조각이 인상적이었다.
도슨트는 또 다른 유물인 옥으로 만든 귀고리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이 흰색의 옥귀고리는 중국의 산동지방에서 출토되었는데, 우리나라 강원도 지방에서도 같은 모양의 옥 귀고리가 출토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자가 태어난 산동지방과 우리나라는 오랜 옛날, 같은 문화권을 지니지 않았겠느냐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또 도슨트는 중국의 진시황제를 지키는 병마용갱에서 상투를 뜬 병사의 형상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그 시절 동이족과의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사료가 되지 않을까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밖에도 박물원에는 유명한 글씨와 자기 등을 비롯한 수많은 유물이 많이 있었지만 약 2시간에 걸친 도슨트의 해설로서는 그 유물을 일일이 다 살펴 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또 이 박물원에 소장된 작품들은 주로 자금성이라는 왕궁에서 왕이나 귀족들이 아끼고 즐기던 유물이라 평민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작품은 거의 없을 정도였던 점도 많이 아쉬웠다.
한편 나역시도 박물원의 유물에 대한 사전 지식도 충분치 못하여 정확히 이해 하지 못한 채설명을 들었던 유물도 있었던 것 역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도슨트의 안내를 받고 박물원을 둘러본 사람들 중에는 한국의 어린 학생들도 많이 있었는데, 모두들 열심히 듣고 이해하려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아쉬움을 남긴 채 고궁박물원 관람을 끝낸 우리 가족은 근처 딘다이펑 식당을 찾았다. 이곳도 다른 딘다이펑 식당처럼 손님들이 많아 우리는 거의 1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고궁박물원에서 보았던 여러 가지 유물들을 떠올렸다. 그 중에는 진시황제의 도량형 그릇이며, 곡식의 양을 헤아리는 말 등도 기억났다. 또 북송시대의 청자기며 송대 여요에서 구워낸 청자 등도 떠올랐다.
기다렸다 식사를 해서인지 우리 가족은 아주 맛있게 즙이 나오는 중국식 만두며 여러 가지 다른 음식을 포식했다. 나도 아내도 아들도 손주도 모두 맛있게 먹고 또 먹었다. 평소 비교적 먹는 양도 적었던 며느리가 이 식당에서만큼은 행복한 표정으로 음식을 즐겼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 가족은 단수이(淡水)역을 향하여 지하철을 탔다. 40분 가까이 달린 끝에 우리나라에서는 판타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배경으로 유명한 단수이 역에 도착하여 우리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사교 댄스를 추고 있는 일군의 남녀 어르신들을 볼 수 있었다. 또 다른 몇 군데에서도 그렇게 사교 댄스를 추고 있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대만이 17세기 초에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교댄스의 문화도 혹시 그러한 영향에서 나타난 문화가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그런데 화장실에 갔던 며느리가 갑자기 얼굴이 백짓장처럼 허옇게 되어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우리 일행은 순간 너무도 놀랐다. 이번 여행의 계획부터 세밀한 안내까지 도맡아 하며 애쓴 며느리가 너무도 걱정이 되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다가, 아까 점심 때 모두가 음식을 포식했던 게 떠올랐다. 체한 게 분명해 보였다. 얼굴이며 손이 얼음장처럼 찼다. 며느리가 다시 화장실을 다녀 온 뒤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천만다행이었다. 우리는 며느리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단수이 근처를 돌아보았다. 단수이는 우리나라의 제물포처럼 서양 문물이 대만으로 들어오던 관문이었다고 한다. 섬 내륙으로부터 남중국해로 흘러가는 단수이강의 하류이자 바다와 맞닿은 지점이어서 무역항으로 번성하다가 20세기 들어 항해술의 발달과, 선박의 덩치가 커지면서 수심이 얕은 단수이는 차츰 쇠락의 길로 접어 들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와 스페인, 일본과 중국 문화가 어울려 있는 단수이를 거니는 동안 우리는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단수이의 아름다운 황혼을 뒤로 하고 다시 기차에 올랐다. 빈 자리가 없어 서서 가야 했는데 웬 젊은이가 자리를 나에게 양보해 주었다. 한국인인가 해서 인사를 건넸더니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외국인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그 마음이 내내 고마웠다. 내 자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며느리의 얼굴도 거의 혈색을 찾은 듯이 보였다. 마음이 좀 놓였다. 그리고 여행을 위해 애써준 그 마음이 고마웠다. 시아버지인 내가 대만 여행을 우겨서인가 싶기도 하여 미안함 마음 또한 컸다.
여행 4일차 오늘은 귀국하는 날.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숙소와 가까운 곳에 있는 용산사라는 절을 찾았다. 타이베이 중정구에 위치한 붉은 지붕의 용산사는 대만의 대표적인 사찰로 약 300년의 역사를 가진 절이라 한다. 특이한 점은 이 절은 불교는 물론 도교와 민간신앙까지 결합된 형태의 절이라 다양한 신들을 모시고 있다는 점이다. 현지인들이 일상적으로 들러 기도를 드리는 곳으로,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문화체험 장소로도 활용되는 사찰이다. 사찰 중앙에는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이곳에는 향을 들고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섬세한 조각과 장식들도 인상깊게 느껴졌다.
용산사를 둘러 본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보피랴오 역사 거리를 찾았다. 대만에 도착하고 처음 3일은 날씨가 그리 무덥지 않아 즐거웠는데 이 날은 습도가 높고 기온도 높아 짧은 거리였지만 걷기가 조금은 힘이 들었다. 보피랴오 역사 거리는 과거 항구를 통해 들어온 삼나무 껍질을 벗기는 1차 작업을 하던 곳이다. 이 거리는 청나라 초기에 형성되어, 청나라와 일제, 중화민국의 세 시대를 거쳐 각 시대의 건축 양식과 인문적 특징이 혼합되어 있어 중국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거리라고 한다. 2009년 복원된 이래 역사적 건물의 활용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보피랴오 거리를 끝으로 하고 우리는 타이베이 공항으로 가 귀국길에 올랐다. 대만은 전체적으로 대중교통이 발달되어 있어 교통이 편리했다. 기차도 그랬고 택시도 그랬다. 교통질서도 상당히 잘 지켜지는 것 같아 부러웠다. 특히 대만엔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오토바이도 교통질서를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다른 차들도 오토바이에 대해 배려하는 모습이 여러 군데에서 눈에 띄었다. 택시의 경우 우리 일행은 우버를 이용해 호출하곤 했는데 호출하는 대로 바로 바로 택시에 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택시 중에는 현대차가 타기에 편해 흐뭇했다.
에어로케 비행기는 올 때처럼 약 2시간 정도 늦게 출발했다. 비행기는 하늘을 날아 청주공항이 저 아래 보였다. 비행기가 착륙하는 동안 우리는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안전하게 도착하게 해 달라고....
집에 도착하면서 아내가 말했다. ‘행복했어요!’ 라고....
고마워요! 사랑하는 나의 가족! 특히 더 이상 잘 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해 애써준 최고의 가이드 며늘아가, 고마워요!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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