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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을 맞아, 먼데이타임스는 충절과 인재의 고장 진천이 낳은 위대한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선생의 삶과 업적, 그리고 선생을 기리는 다양한 노력과 그 의미를 깊이 조명하기 위해 진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홍제 문화해설사를 만났다.
보재 이상설 선생님은 3·1운동 이전부터 이미 조국 독립의 길을 개척하신, 독립운동사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분입니다. 1·2차 아편전쟁, 일본의 개항, 강화도 조약 등 격변의 국제 정세 속에서, 충청도 진천의 한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천재성과 총명함이 널리 알려졌지만,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부모님의 걱정이 컸습니다. 마침 경주이씨 출신이자 진천 교성리 출신인 동부승지 이용우 씨가 슬하에 자식이 없어 양자를 찾던 중, 관상가와 함께 선생의 재능과 인품을 보고 일곱 살에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요. 13세 되던 해 4월, 양부와 친부가 모두 세상을 떠나셨고, 이듬해 친모마저 여의었습니다. 3년 상을 마친 16세 때 달성서씨와 혼인하셨으며, 17세에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옆집으로 이사하면서 조선의 엘리트들과 교류하며 신흥사에서 신학문을 배우는 전환점을 맞으셨습니다.
20대에는 동서양 학문의 일인자로 인정받았고, 1894년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 급제하셨습니다. 1896년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되어 수학과 과학을 정규 교과목으로 편입시키는 선구적 시도를 하셨는데, 이는 “국력은 과학에서, 과학의 기초는 수학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 수학·과학 교육의 개척자로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학문보다 독립운동에 헌신하셨습니다. 일제의 황무지 개척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그 의도를 저지했고, 을사늑약 때는 다섯 차례나 목숨을 걸고 순사직 상소를 올리며 조약 체결을 막고자 하셨습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뒤에는 가산을 정리해 만주 용정으로 건너가 ‘서전서숙’을 세우고, 누구나 배울 수 있는 무상교육과 항일 민족교육을 실천하셨습니다.
비록 서전서숙은 선생이 고종의 밀명을 받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가시면서 1년 만에 문을 닫았지만, 그 정신은 명동학교, 한민학교, 신흥무관학교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특사단 활동은 숙소 앞에 태극기를 게양하며 시작됐으나, 20일 만에 이준 열사의 순국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군대를 해산하고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켰으며, 궐석재판으로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헤이그 특사가 세 분이라 알고 계시지만, 사실 정사는 이상설 선생이었고, 이준·이위종 두 분이 부사, 그리고 헐버트 박사까지 포함해 네 분이었습니다. 당시 나이는 이상설 선생 37세, 이준 열사 48세, 이위종 열사 23세였습니다. 이들은 조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으나, 선생은 그 뒤로도 미국과 연해주를 오가며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는 신념 아래 독립운동 전략을 세우고 실행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한 분이었으며, 근대 수학·과학 교육의 개척자, 동서양 학문의 권위자, 독립운동의 전략가이자 실천가, 소통과 통합의 지도자였습니다. ‘보재(溥齋)’라는 호처럼 미치지 않는 학문이 없었고, 사람과 세상을 품은 지도자로서, 국가에 대한 무한한 책임과 실천을 다하다 1917년 연해주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선생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3·1운동 이전의 독립운동사를 온전히 말할 수 없습니다.
Q. 보재 이상설 선생님을 기념하는 기념물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요? 선생을 기념하는 기념물로는 1957년 건립된 유허비, 1975년 제작된 숭모비, 1976년 건립된 숭열사 사당, 1996년 그리고 1998년 복원된 생가 등이 있는데, 숭모비와 사당은 본래 진천읍 남산골에 있던 것을 현재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선생의 유언에 따라 가족과 이동녕 선생 등 임종을 지킨 분들이 화장을 하여 시신은 물론 유품을 모두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나, 1996년 국가보훈처와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에서 순국하신 우스리스크 수이푼 강으로 가서 초혼례를 올리고, 물 한 병과 흙 한 줌을 가져와 부인인 달성서 씨와 합장묘를 조성하였습니다. 초혼례를 올릴 때 지켜본 초대 기념사업회 회장이었던 이상일 씨(92세)에 따르면, 1996년 숭모비를 남산골에서 현재 위치로 옮길 때, 비신에서 눈물이 흘러 당시 지역 신문에 크게 기사화 된 적이 있다고 하면서, 초혼례를 지낼 때도 제례 도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눈을 뜰 수가 없었는데, 바람이 멎고 보니 제례상 위에 흙 한 줌이 놓여 있어,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특히, 숭모비의 경우 비문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이 쓰셨고, 비문 내용은 노산 이은상이 지은 것인데, 보재 선생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위상과 존숭을 상징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죠.
Q. 보재 이상설 기념관은 언제 어떻게 세워졌으며, 현재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요? 2015년 보재 기념관이 국가현충시설 건립사업에 선정되어, 2016년 총공사비 87억원으로 시작하려 했으나, 여러 우여곡절 끝에 2020년 9월 착공하게 되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인건비와 자재비가 급등하여, 총공사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함에 기념관 건립이 중단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송기섭 진천군수의 단호한 의지와 지역사회 및 기업체 등의 후원으로 공사를 강행하여 보재선생의 순국일인 2024년 3월 31일 개관했습니다. 단일 규모로는 국내 최대의 기념관이라 자부할 수 있는 곳입니다. 특히 총공사비 130억여 원에 달하는 공사비는 인구 9만의 작은 지자체인 진천군으로서는 버거운 일이었으나, 지자체장과 공무원, 지역 사회, 그리고 군의회의 역사와 문화 의식이 오늘의 기념관이 있게 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지요.
보재 선생의 순국일에 대해서는, 2023년 10월에 세미나를 거쳐 1917년 3월 31일로 공인하였으나, 아직도 네이버, 다음, 구글 등 인터넷 검색창에는 순국일이 제각각으로 표기되어 있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기념관에 오시면 기념관 앞에 우뚝 솟아 있는 국기게양대를 보면서, 이상설 선생의 숭고한 나라 사랑과 선생의 순국일을 생각해 볼 것을 제안드립니다.
바로 국기 게양대의 높이가 선생의 순국일을 상징하는 33.1m로 세워져 있으니까요.
Q. 보재 이상설 선생님의 서훈 승격과 관련하여 말씀해 주시겠어요? 보재 선생의 서훈이 현재 2등급 대통령장인데, 1등급 대한민국장으로 격상시키고자 진천군을 비롯하여 충청북도 교육청, 충청북도청 및 의회도 함께 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시군자치구의장협의회에서도 서훈 등급 상향을 7월 16일 정부와 국회에 건의를 하였습니다.
함께 특사로 간 이준 열사는 1등급인데, 이상설 선생과 이위종 선생 그리고 헐버트 박사는 현재까지 2등급이며,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함께 하며 이후 상해임시정부의 주축이신 이동녕 선생도 2등급이라는 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숙제이자 염원이 아닌가 합니다.
Q. 충절의 고장 진천에는 보재 이상설 선생님 외에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 광복절을 맞아 이상설 기념관에 함께 합사될 인물들을 포함해 소개해 주시겠어요? 이상설 기념관에 현재 안치되어 있는 독립운동가의 흉상은 보재 선생을 제외하고, 여덟 분으로 신팔균 장군, 임수명 여사, 조명희 선생, 박기성 선생, 홍경식 선생, 오상근 선생, 신형균 선생, 유재복 선생이 있습니다. 신팔균 장군은 조선의 마지막 군인으로 헤이그특사로 인해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자 고향인 진천 이월로 내려와 학교를 세웠고(지금의 이월초), 이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의 장군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일제와의 전투에서 42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는데, 간호사 출신으로 독립운동의 길을 함께 한 임수명 여사가 장군의 순국 소식에 충격을 받을까 염려하려 알리지 않았으나, 이 소식을 알게 된 여사는 서른 살의 나이로 어린 딸과 극약을 먹고 자결하였습니다. 포석 조명희 선생은 민족 민중 문학의 개척자로 카프문학의 금자탑인 『낙동강』을 1927년에 발표했으며,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8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문학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알렸습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던 선생은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일제의 스파이란 누명을 쓰고 1938년 44세의 나이로 총살당하였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상설 선생, 신팔균 장군, 임수명 여사, 조명희 선생이 전부 띠 동갑이라는 사실입니다.
박기성 선생, 홍경식 선생, 오상근 선생, 신형균 선생, 유재복 선생 등 다섯 분은 이상설 기념관을 오셔서 알아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Q.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진천군에서 준비 중인 특별한 광복절 행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행사인지 소개해 주시겠어요? 지난해 준공식 때에는 보재 선생님 한 분만 모신 중앙 홀 공간을, 진천 지역 출신 여덟 분의 흉상을 마련하여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제막식을 할 예정인데, 이는 전국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며, 진천 지역이 충절과 인재의 고장이라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시공간적으로 말해주는 행사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Q. 보재 이상설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현재 청소년 교육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어떤 영향을 주는지요? 이상설 선생을 기리는 비영리 단체 두세 개가 설립되어,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 혹은 기념관에서 이론 및 체험활동 교육을 체계적으로 하고 있으며, 군과 지역 교육청, 그리고 지역사회에서도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상설 선생의 생애와 활동이 교육 그 자체가 되므로, 청소년들에게는 부모로부터의 자립과 독립, 미래의 대한 꿈과 자기혁신, 세상을 보는 관점과 세계화의 관점에서 외국어 역량키우기 등을 교육 할 수 있고, 활동 무대 또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로 확대할 수 있으며, 과목 또한 수학, 과학만이 아니라 총괄 선택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Q. 보재 이상설 선생님에 대하여 관광객이나 지역주민, 청소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 지역 청소년들은 “이상설 선생이 이렇게 훌륭한 분인지 몰랐다”, “진천에 이상설기념관이 있어 정말 좋다”, “이곳은 진천의 독립기념관이다”라고 말합니다. 반면, 지역민들은 “선생이 우리 고장 출신이라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탐방객들 역시 “보재 선생이 이렇게 위대한 분인 줄 미처 몰랐다”, “연해주에 가보니 정말 전설적인 인물이었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신권 지폐를 발행한다면 1호로 들어갈 역사 인물”이라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분”이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Q. 문화해설사로 활동하시면서 청소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그 과정에서 느끼신 보람이나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람은 배우는 데 세 가지 부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날 때부터 아는 사람, 배워서 아는 사람, 그리고 필요에 의해 배우는 사람입니다. 아는 것은 어떻게든 알 수 있지만, 실천은 각자 다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바르게 알고, 제때에 실천하는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해설사로서의 시간은 힘들다기보다 보람찬 날이 더 많았습니다. 처음 만나는 분들과 역사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서로 공감하고 응원해 주실 때가 많아 큰 힘이 됩니다. 덕분에 지역 기관이나 사회단체, 대학 등에서 특강 기회를 얻기도 했고, ‘이 공부를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역사의식을 나누며 힐링하는 순간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 요즘은 더 깊이 있는 해설을 위해 주역 공부를 시작한 지도 2년이 되어가는데, 이것이 최근 저의 가장 큰 즐거움이자 보람입니다.
*조홍제 문화해설사는 2014년 중등학교에서 퇴직한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내던 중, 우연히 윤병석 교수의 『이상설 평전』을 읽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을 알게 되었다. 며칠 동안 가슴 뛰는 설렘 속에서 이상설 선생과 지역 인물들에 대해 깊이 공부하게 되었으며, 2019년부터 현재까지 문화관광해설사로서 진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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