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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피어난 나의 꿈과 삶

카잉 카잉 모택(Khaing Khaing Moe Htet, 한국명: 서예은) | 기사입력 2025/09/07 [00:03]

한국에서 피어난 나의 꿈과 삶

카잉 카잉 모택(Khaing Khaing Moe Htet, 한국명: 서예은) | 입력 : 2025/09/07 [00:03]

카잉 카잉 모택은 미얀마 출신으로 양곤대학교 독일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으로 유학하여 공주대학교 영상학과에서 공부하였다. 그녀는 현재 한국에서 배우 겸 크리에이터, 영상 영상 콘텐츠 제작자로 일하고 있으며, 미얀마 MRTV-4 방송국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그녀는 E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천불천탑의 신비 미얀마“ 제작에 참여하고, MBC Everyone의 “대한외국인” 등에 출연한 바 있으며 80만 SNS 팔로워들을 대상으로 다국어 콘텐츠 운영. 외국인 대상 K-라이프스타일 및 한국어 교육 강의, 기획–촬영–편집–운영까지 직접 수행하는 원스톱 제작자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 주)

 



외국인으로서 한국에서의 삶은 애초부터 쉬운 길이 아니었다. 스물한 살, 설렘과 용기로 부모님의 품을 떠나 한국 땅을 처음 밟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그렇게 따뜻하고 안전한 울타리를 떠나 타국에 발을 내디뎠다.

 

2013년 당시, 미얀마에서 한국 유학을 간다는 것은 장학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가족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해외 유학은 큰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두려움보다 도전 정신이 앞섰다. 그러나 기숙사와 학교생활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부모님의 보호 아래 자유롭게 살던 습관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웠고, 미얀마의 피상적인 교육 방식에 익숙해 학업도 깊이 있게 이어가지 못했다. 결국 2년이 채 되지 않아 한국을 떠나며 이 추운 나라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돌아간 미얀마에서 나는 무모할 정도로 많은 도전을 했다. 스물 다섯 살 때에는 대규모 EXO 공연을 기획해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지만, 경제적으로는 큰 손실을 감당해야 했다. 그 실패는 나를 오랫동안 움츠려 들게 했고, 부모님이 나로 인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매일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미얀마는 더 이상 나의 자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특별한 꿈이나 희망 없이, 단지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화장품 회사에서 해외영업 업무를 맡으며 몇 년을 보냈다. 매일의 출퇴근과 주말의 소소한 여유는 안정적이었지만, 동시에 감정이 메말라가는 듯했다. 사랑하는 연인도 있었고 삶은 평온했지만, 열정과 좌절, 기쁨과 눈물이 함께하던 다채로운 시절이 그리워졌다. 남자친구는 비자를 위해 결혼을 제안했지만, 나는 한국에서 외국 여성이 정착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결혼이라는 시선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길을 찾기로 했고, 학사 졸업장이 없음에도 비자를 준비해 D-10, E-7, 그리고 F-2까지 직접 취득했다.

 

그 무렵 SNS가 급속히 성장했다. 나는 단순히 기록하는 마음으로 영상을 올렸는데, 하루 만에 팔로워가 수만 명 늘어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이 길도 가능하구나라는 깨달음은 나를 다시 무대 앞으로 이끌었다.  그래, 이제는 TV에 나가고 싶다. 어릴 때부터 꿈이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영상학과에 입학한 이유도 사실은 TV에 나가고 싶었지만 못할 것 같아 택한 차선이었다. 이제는 몇 십만 팔로워도 있으니 도전할 만하지 않겠나? 하고 프로필 사진을 찍고, 프로필을 만들어 인터넷에 있는 모든 연락처로 이메일을 보냈다. 심지어 카카오 단톡방에도 가입해 무작정 연락했다. 대부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운 좋게 한 캐스팅 디렉터가 나를 눈여겨보게 되었고, 그렇게 처음 아리랑 TV에 서브 MC로 출연하게 되었다. 현장을 읽는 재주가 있었던 나는 첫 출연만에 PD님들 마음에 들었고, 이후 2년 연속 출연을 이어갔다. 이어서 MBC <대한외국인>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원래 목표로 삼았던 방송이었다. 그 순간, 나는 목표를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방송계에 발을 내디딘 신인 외국인 출연자로서,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을지가 문제였다.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큰 터닝포인트였다. 

 

나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무엇을 진정 잘하는가? 내 전문 분야는 무엇인가? 그러나 여태 무언가를 깊게 파고든 적이 없었던 나는 전문성이 없었다. 방송을 계속하려면 안녕하세요, 미얀마에서 온 카잉입니다.라는 소개만으로는 부족했다. 운만 기다리는 삶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갓생이 시작되었다. 만 서른, 나는 연기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방송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직장은 포기했기에 수입은 일정치 않았다. 키 155cm, 몸무게 41kg의 몸으로 배달까지 뛰었다. 그만큼 애정이 컸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르게 가기로 했다. 기초부터 배우자. 무언가를 10년 이상 하면 장인이 된다는데, 포기하지 않고 40살까지 하면 무언가는 될 거야하고 말이다. 

 

돈도 없으면서 지금의 나의 선생님을 찾아가 선언했다. 연기를 배우겠다. 돈은 어떻게든 만들어 오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겁도 없었다. 20살에 처음 한국으로 유학 온 내가 다시 떠올랐다. 새로운 꿈을 향한 도전을 시작할 무렵, 4년을 교제한 남자친구와 이별했고, 막 한국에 유학 온 여동생과 함께 전쟁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실제 생활은 영화처럼 아름다운 결말을 주지 않았다. 매일이 전쟁이었고, 매일 밤 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괴로워서가 아니라, 매일 구원을 바라는 기도 같은 울음이었다. 그때가 2023년이었다. 연기를 시작하면서 시각화와 감사하기를 매일 실천했다. 무엇을 감사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억지로라도 하루에 천 번 감사하다를 외쳤다. 통장에 0원이 찍히는 날도 많았다. 생활비, 월세, 레슨비, 동생까지 책임져야 했으니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2025년 9월. 그로부터 3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남았다. 여러 일을 병행하며 살고 있지만, 오늘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다. 가끔 불운이 찾아와도, 어려움이 닥쳐도 나는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감사는 이제 억지가 아닌 나의 기본 감정이 되었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 애쓰냐고 묻지만, 나는 애쓰는 게 아니다. 이제야 내 삶을 찾은 것이다. 꿈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임을 알게 되었다. 불운과 행운 모두 삶의 일부이고, 나는 그저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이 내 삶을 다채롭게, 성장하게 한 요소였다. 

 

지금 나는 배우라는 직업과 여러 일을 병행한다.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영상 제작과 SNS 운영 강의와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렇게 헛되게만 산 줄 알았던 20대는 사실 지금의 나를 만드는 자양분이었다. 30대의 나는 다시 꿈을 꾼다. 이번에는 지혜와 기본을 갖추며 조급하지 않고,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나아가고 있다.  

 

카잉 카잉 모택

마지막으로 꼭 말하고 싶은 것은, 나의 삶을 이렇게 만들어준 것이 한국이라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내 모국 미얀마는 야망이 큰 내가 꿈을 펼칠 환경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은 지금의 나로 살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살았고, 살고 있으며, 성장했다. 앞으로도 이곳에서 나의 모든 꿈을 이루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또한 현재 꿈을 펼칠 수 없는 미얀마 젊은이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바로 내가 준비하는 40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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