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마 레클리스와 조각가 조슬린 러셀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하되, 時不利兮騅不逝(시불리혜추불서) 시운이 불리하여 오추마가 나가지 않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내하) 추가 나가지 않음은 어이할 수 없거니와 虞兮憂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내 어이하리.
한나라 유방과 천하를 겨루던 항우의 절명시로 불리는 ‘해하가(垓下歌)’이다. 이 시에 나오는 오추마(烏騅馬)는 항우와 함께 전장을 누비던 말인데, 항우가 자결하자 자신도 따라 목숨을 거두는 명마다. 삼국지의 영웅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위나라의 여섯 장수를 참하고, 5관을 돌파할 때, 그가 탔던 말은 적토마였다. 적토마 또한 주인이 생을 다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명마 중의 명마이다. 이와는 이미지가 다르지만 세르반테스의 풍자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자신을 중세의 위대한 기사로 착각하며, 자신의 비루먹은 말 ‘로시난테’ 또한 명마로 착각한 채 온갖 해프닝을 벌인다. 기사에게 말은 그만큼 필수적인 동반자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전쟁 양상이 달라지면서 전쟁에서 말의 역할은 점점 미미해지고 있다. 말이 가지고 있는 수송 능력과 속도는 현대식 장비에 비해 현저히 뒤지기 때문이다. 다만 전투 지형이나 조건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무모할 정도의 용감성’을 지녔다 하여 ‘레클리스(Reckless)’로 이름 붙여진 이 제주말이 바로 그런 경우다. 한국전쟁 당시 차량이 달릴 수 없는 한반도 전방의 거친 지형과 진창 같은 논밭을 달릴 수 있는 말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더구나 한국전쟁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의 하나인 ‘네바다 전초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레클리스는 그 어떤 말과도 비교되지 않는 전쟁 영웅이다.
레클리스는 한국전쟁에 참여하기 전 ‘아침해’로 불렸다. 아침해의 주인은 김혁문이었는데, 다리를 잃은 누나의 의족을 구하기 위해서 아침해를 미 해병대에게 팔게 된다. 미 해병 에릭 페더슨 중위는 거친 지형을 뚫고 탄약을 나를 수 있는 수송용 군마로 아침해를 250달러에 구입하였고, 아침해는 1952년 10월 26일 미 해병대에 입대하였다.
레클리스는 위험천만한 임무인 탄약 수송을 맡게 되는데, 400kg의 이 작은 암말은 총알과 포탄이 날아오는 전장에서 무거운 탄약을 나르며 임무를 수행했다. 레클리스는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던 1953년 3월 미 해병과 중공군 120사단이 맞붙은 ‘네바다 전초 전투’ 당시 총 386발, 약 5톤의 무반동포 포탄 386발을 51차례에 걸쳐 실어 날랐다. 또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전우들을 이송하는 등 놀라운 공을 세우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네바다 전초 전투는 미 해병대 한국전 역사 중 가장 치열하기로 손꼽힌다. 네바다 전초라는 이름은 미국 네바다주의 도시 이름에서 유래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대는 베가스, 리노, 카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초기지를 운영했는데, 이 이름들은 모두 네바다주의 주요 도시에서 따온 것이다. 이러한 명칭은 미군이 전초기지를 식별하기 쉽게 하기 위한 전략적 명명 방식이었다. 네바다 전초 지역은 판문점 동북쪽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매향리 일대에 위치해 있었는데, 미 해병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54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미군은 모두 본국으로 철수한다. 레클리스는 그녀를 처음 해병대로 입대시킨 에릭 페더슨 중위와 함께 미국으로 가지 못한다. 그러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지에 레클리스에 대한 사연이 실리자 가족인 해병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본토로 데려와달라는 미국민들의 청원이 이어지고, 한 해운업자가 배편을 무료로 내줘서 미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 후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있는 캠프 펜들턴에서 지내게 된다. 적의 총탄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한 레클리스의 용맹함은 마침내 랜돌프 해병1사단장에게도 알려져서 1957년 명예 상사로 진급하게 되고, 1959년에는 예포 19발을 포함한 성대한 전역식을 치르며 은퇴하게 된다. 레클리스는 전장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생전에 퍼플 하트 훈장을 포함해서 총 10개의 훈장을 수여했으며, 1997년 라이프 매거진 특별호에서 미국 100대 영웅에 선정된다. 그 후 1968년에 생을 마감했다. 미 해병대는 정식으로 군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기지 내 묘지에 매장하였으며, 그녀가 기거한 마구간 옆에 기념비를 세웠다. 우리나라보다 미국에서 유명한 이 말을 위해, 미 국방부는 2013년 7월 26일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미국 버지니아 주 콴티코의 해병대 본부 내 국립 해병 박물관에서 기념관 헌정식을 열었다. 레클리스 기념관에는 이 말의 동상과 함께 각종 자료가 전시 중이다. 또한 2016년에는 펜들턴 해병기지에 동상이 세워지고, 경주마의 명예의 전당 격인 켄터키주 렉싱턴 호스파크에도 동상이 세워져 그녀를 기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레클리스가 활약한 베가스 전초 인근 고랑포구 역사공원(연천군 장남면 소재)에는 레클리스 동상이 설치되어 그녀의 공적을 기념하고 있다. 전시관 내부에는 레클리스를 보호하며 아군 진지까지 탄약을 운반하는 VR 게임도 있다. 제주 렛츠런파크에도 제주말의 후손인 그녀의 동상을 세웠다. 매년 현충일에는 이곳을 포함한 여러 곳에서 레클리스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려, 그녀의 높은 행적을 기리고 있다.
이처럼 레클리스는 미국과 한국에 걸쳐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영웅 대접을 받은 말이다.
한국전 정전 72주년을 맞아 제주말 ‘아침해(레클리스)’가 다시 탄생, 영원의 세월을 살게 됐다. 레클리스가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KBS 제주방송총국(총국장 이재홍)이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한국전쟁 75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영웅의 귀환, 레클리스(연출 강현주, 작가 김선희)’를 방송했다. 현충일 특집이었다.
KBS 제주는 지역방송 최초로 인공지능(AI)으로 전장의 영웅마 레클리스를 재연했다. 제작진은 이번 방송을 통해 레클리스를 영원한 해병이자 영웅으로 추앙하는 미국에서부터 경기도 연천, 제주를 오가며 왜 기억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특히, 참혹한 피의 전장이라 불린 네바다 전초 전투 활약상은 지역방송 최초 생성형 AI 기술을 활용해 영상화했다. 내레이션은 제주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배우 김희애가 맡아 몰입도를 더했다.
KBS 제주는 “제주마 레클리스의 활약상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가치를 되새겨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다큐는 6월 21일 오후 1시 5분 KBS1에서 재방송을 통해 전국 시청자들을 다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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