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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작가는 1986년 함경북도 은덕(아오지)에서 평범한 노동자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90년대 북한의 대기근 시기에 탈북, 북송, 재탈북의 우여곡절 끝에 2006년 말 대한민국에 정착했다. 이후에 <르 피가로> 서울 특파원인 세바스티앙 팔레티와 함께 자신의 경험을 담은 자서전 「열한 살의 유서 (영어본 A Thousand Miles to Freedom)」를 저술하고 다큐멘터리 영화 “열한 살의 아라리”에 출연하는 등 국내외에서 북한인권개선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편집자 주]
A1 저는 북한 함경북도 은덕 (옛 이름, 아오지) 출신 탈북민으로, 「열한 살의 유서」 저자이자 북한인권증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두 딸 엄마 김은주입니다.
Q2. 간단히 이야기하기 어렵겠지만, 탈북하게 된 이유와 과정을 설명해 주세요. A2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불리던, 북한의 대기근으로 아버지가 영양실조로 사망하고, 1년 넘게 꽃제비 생활을 하던 중, “여기서 굶어 죽을 바에는 두만강을 건너다 총에 맞아 죽자!”는 엄마를 따라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탈북 첫날 14살 언니는 지나가던 차량에 납치되어 몹쓸 짓을 당해야 했고, 이후 저희 세 모녀는 2천 위안에 중국인 남성에게 팔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동생이 태어났지만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되어야 했고, 북한에서 또다시 굶주림과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재탈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Q3. 탈북 이후에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생각이나, 혹시 어려웠던 점이 있으면 설명해 주세요. A3 종종 대한민국에서 어떤 점이 제일 좋았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면 저는 “노력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게 가장 좋다.”고 대답합니다. 신분에 따른 차별은 물론, 돈과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겐 노력할 기회조차 없는 사회가 북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인에게 노력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대한민국일지라도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닙니다. 가끔은 부모가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염려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직까지 일반 국민들의 탈북민에 대한 이해 부족은, 무관심과 선입견으로 이어지고, 차별을 낳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Q4. 탈북 이후에 한국에서 다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셨는데, 어떤 과정을 거치셨는지,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현재도 공부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학업 계획을 말씀해 주세요. A4 저는 22살에 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했습니다. 4~5살 어린 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11년의 학업 공백 기간을 채우며 따라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동급생들이 연예인이나 일상 이야기를 해도 맥락을 모르니, 대화에 낄 수 없어서 저 스스로 외톨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영어는 알파벳도 잘 몰랐고, 국어는 읽을 수는 있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수학은 일찍이 포기해야 했죠. 하지만, 5살 많은 언니이기에 학업 태도에 있었서만큼은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하기도 하고, 한 번의 지각 없이 개근상을 받고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착실한 학업 태도만큼 성적도 많이 올라 처음에 꼴찌였으나 졸업할 때는 중간 이상의 성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배움에 끝이 없다는 말처럼, 저는 앞으로도 계속 무언가를 배우고 있을 것 같은데요, 지금은 언어와 지식,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되어 해외 유학을 계획하고 있기도 합니다.
Q5. 「열한 살의 유서」 수기를 쓰게 된 동기와 과정을 간단히 설명해 주세요. A5 저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이라는 시민단체로부터 대학민국 정착 초기부터 꾸준히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대한민국 정착 초기부터 탈북민 들은 다양한 지원과 도움을 받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였죠. 빈 손으로 대한민국에 오다 보니 나눌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저의 살아온 이야기가 바로 제가 나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 자서전의 공동 저자인 세바스티앙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탈북민들의 이야기가 하도 기구하다 보니, 그날도 그냥 봉사 차원에서 그의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바스티앙은 저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기로 결정했고, 저 또한 북한인권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책이 2012년에 나왔지만, 제 자서전에는 1999년 2월 18일 중국에서의 첫날 밤에 언니가 당한 일은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너무 큰 고통이었기에 당시 용기내어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인권활동을 하는 나 조차도 다 말할 수 없는데, 다른 탈북민들은 어떠할까? 지금까지 알려진 탈북민들의 고통과 그 기구한 삶의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겠구나. 마음 속에 깊이 묻어둔 상처가 치유될 수 있기는 한걸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저도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에 늘 아픔이 있지만 그동안 다 하지 못했던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Q6. 「열한 살의 아라리」 다큐영화 촬영과 관련된 말씀을 해주세요. A6 책이 나오고 13년 만에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습니다. 책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이제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아주 적은 예산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 보니 여러 아쉬운 부분들이 있지만, 다양한 경로와 방식으로 북한인권을 알릴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관중석에 앉아, 보는 내내 울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을 땐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직도 그 어두운 과거와 이별하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생존자인 우리가 참고 이겨내야 하는 거겠죠.
Q7. 그동안에 김 선생님이 국내 TV 프로그램 '이만갑'에 출연하게 된 계기와 해외 TV 방송에 출연하게 된 과정 등에 대한 말씀을 해주세요. A7 저는 늘 북한인권 실태를 더 많이 알릴수록 문제 해결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잘 알릴 수만 있다면 저는 늘 응해 왔고, 그렇게 이만갑 초창기 멤버로서 출연했고, 이후 15년 만에 다시 출연하여 저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과거엔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는 정착 초년생으로 출연했다면, 이제 대한민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북한인권에 대한 국내 관심을 높이고 싶었습니다. 유엔인권이사회는 22년 동안 꾸준히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인권 이슈는 국제사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전쟁과 갈등에 묻히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호응과 동참을 얻기 위해서는 해외 국제시민들에게 더 많이 알려야 하고, 그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해외 방송에 출연하는 것입니다. 많은 탈북민 중에 제가 나갈 수 있었던 건 미국과 유럽의 다수 국가에서 책을 출판한 것과 함께,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한 덕분이었습니다.
Q8. 그동안에 인권 등과 관련해서 여러 국제회의에 참석해서 말씀을 전한 기회가 있으셨는데, 그 말씀을 해주세요. A8 저는 유엔 유럽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 2번, 그리고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 1번 참석하여, 탈북자로서 북한인권 실태를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었습니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제가 북한인권활동가이기도 하지만, 틈틈히 익힌 영어회화 덕분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외국인 대상으로 북한인권에 대한 강의나 증언을 하다보면 통역을 써야 하는데, 통역하시는 분의 영어 수준과 별개로, 북한이라는 독특성 때문에 탈북민들의 고통 소리가 잘 전달되지 못하는 현실을 깨닫고, 탈북민인 제가 영어를 배워서 청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면 전달력이 더 높아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비록 서툰 영어지만 계속해서 영어로 소통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유엔총회 최초로 열리는 북한인권 고위급 회담에서 제가 탈북민의 목소리를 대신해서 낼 수 있었습니다.
Q9. 현재 여러 가지 일을 하고 계신데, 그 일과 함께 특히 탈북민 관련 활동 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고 앞으로 계획, 그리고 기대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A9 현재 통일부의 북한인권증진위원회 위원으로 북한인권증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탈북민 신진여성연구원으로 이뤄진 ‘이음미래연구소’의 사회협력이사이자,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청년위원 & 난민구조단원’으로 있으며, 탈북민정착지원을 돕는 단체인 '우리온'의 청년자문위원이기도 합니다. 직함은 많지만, 급여를 받고 있는 곳은 한 곳도 없어서, 프리랜서로 생계를 위한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루 빨리 북한인권실태가 개선되어 오로지 저만의 꿈을 좇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의 개인적인 꿈을 좇기엔 이기적인이란 생각이 들고, 피해 당사자인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손을 놓을 수 없습니다. '침묵은 동조'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에 때로는 도망치고 싶어도 꿋꿋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Q10. 그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그런 과정에서 가지고 계셨던 좌우명이나 신조, 인생관 등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A10 제 좌우명은 “하면 된다.”입니다. 감옥과도 같은 북한에서도 생존했는데, 자유와 기회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못해낼 일은 없습니다. 다만 하지 않을 뿐이겠죠. 그래서 저는 제가 잘 되지 않아도 제 탓을 합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채찍질합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Q11. 탈북 이후에 여러 가지 일을 많이 겪으셨을 텐데, 특별히 탈북민으로서 우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세요. A11 탈북민들의 고통은 진행형입니다. 대한민국에 와서도 북한에 두고 온 가족과, 가슴 속 깊이 묻힌 상처로 탈북의 고통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탈북민을 제2의 이산가족이라 부르는 이유인 것이지요. 남북은 결코 남남일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정치권에서마저 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시적 실리를 위해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음을 기억해 줬으면 합니다. 더욱이 인구 1억도 안 되는 한반도를 영구적으로 둘로 나누는 것은 실리적 측면에서도 결코 맞지 않습니다. 행복한 대한민국, 번영하는 대한민국을 위해 통일은 반드시 이뤄야 하는 것입니다.
Q12. 그동안 살아오시면서 특별히 청소년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말씀 부탁드려요. A12 여러분의 옆집에 살고 있는 소녀가 매일 같이 가정 폭력에 시달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분명 경찰에 신고할 것입니다. 여러분 옆집에 살고 있는 소녀가 배고품에 허덕이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분명 한 끼를 굶더라고 그 소녀에게 여러분의 식사를 기꺼이 내어줄 겁니다. 그 소녀가 바로 북한주민이고, 우리의 이웃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북한 주민들을 외면하지 않는 여러분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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