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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 수천 년 전 만주 지역에서 꽃피운 ‘요하문명’

최충호 (청주대 객원교수) | 기사입력 2024/06/29 [15:20]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 수천 년 전 만주 지역에서 꽃피운 ‘요하문명’

최충호 (청주대 객원교수) | 입력 : 2024/06/29 [15:20]

자료: 동아지도 (2007)

한때 ‘요하문명’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2009년 KBS ‘역사스페셜’, ‘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가 방영된 이후였다. 당시 한겨레 신문에서는 학생들이 교과서에는 신화로만 나오는 단군의 실체에 대해 물어보고, “요하문명이 우리 문화와 연결돼 있는데, 왜 우린 그런 것을 배우지 않느냐?”고 묻고 있으며, 이에 대해 교사들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수천 년 전 만주 일대에서 꽃을 피웠던 요하문명은 우리 민족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은 어디에서 왔을까? 흔히 알려진 대로 먼 옛날 알타이산맥 일대에서 춥고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며, 따뜻하고 해가 뜨는 곳 한반도로 이주해 왔던 것일까? 최근 새로운 유적의 발굴과 역사학 및 고고학, 인류학 등의 발전에 힘입어 우리 민족의 시원에 대해서도 좀 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담론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시야를 한반도 너머 만주 일대까지 넓힐 때가 된 것이다.  

 

만주 벌판 한중간에서 요동과 요서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강 ‘요하’가 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이 요하강 유역인 요서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와 발달된 단계를 보이는 신석기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어 중국 학계를 긴장시켰다. 실로 이 고대문명은 그들이 스스로 문명의 북방한계선이라 부르는 만리장성 밖에 위치해 있었으며, 황하문명보다 앞선 것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학계에서는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이 놀라운 고대문명을 ‘요하문명’으로 명명하였다. 만일 이 요하문명을 꽃피운 고대인들이 우리 조상이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다면, 우리 민족의 샘이며 뿌리인 시원문명(始原文明)을 찾아내는 뜻깊은 일이 될 것이다.

 

세계 4대 문명 중의 하나인 황하문명을 대단한 긍지로 여기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 황하문명을 앞서는 요하문명의 발굴은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이민족이라고 경시하던 만리장성 밖에서 이렇게 거대하고 발전된 단계를 보이는 고대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요서지역 일대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가던 중국 학계는 유물들의 지질학적 연대 및 발전 정도를 확인하고, 이 문명을 제5 문명인 요하문명으로 명명했다. 지금까지 황하문명이 가장 앞선 문명이며, 근처 여러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산시켰다는 주장을 스스로 뒤집는 결과였다. 그런데 이들은 황하문명을 앞서는 이 문명의 주도 세력이 자신들 조상이며, 따라서 이들이 이룩한 역사는 모두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국가 차원의 역사공정이 만들어 낸 억지스런 결과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 만주 일대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고조선‧예맥‧부여‧발해‧고구려 등 우리 한민족(韓民族) 조상들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되고 만다. 이미 중국은 역사 교과서에서 부여‧발해‧고구려를 중국사로 가르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백두산(白頭山)을 창바이산(長白山)으로 세계지질공원에 등재했다. 특히 2017년 시진핑이 트럼프와의 회담에서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라고 한 발언은 중국인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하문명 지역은 우리 민족의 상고시대의 활동 무대였다. 고조선‧예맥‧부여‧고구려 등은 바로 이 지역에서 번영과 쇠락의 역사를 함께 써내려 간 우리의 고대국가들이다. 요하문명의 각종 신석기-청동기시대 유적은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발굴되었다. 현재 우리 교과서에는 비파형동검 등이 출토된 요서 지역을 포함한 만주 지역도 ‘고조선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새롭게 발견된 요하문명이 우리와 무관하다는 논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사태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식민사학을 둘러싼 사학계의 갈등, 재야 사학과 강단 사학, 민족주의 사학과 실증주의 사학 사이의 갈등이 문제를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요하문명이 우리의 상고사‧고대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역사학자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가슴 벅찬 과업일 것이다. 앞으로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고 우리 문명의 시원을 밝히는 데 힘을 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요하문명이 꽃피던 지역인 랴오닝성, 지린성, 내몽골 자치구 등은 오랜 기간 개발이 늦어졌던 드넓은 허허벌판이었다. 이런 곳에서 황하문명보다 이른 시기에 문명이 발생했다는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하문명 지역의 연대는 어떤 과정을 통해 측정했을까?

 

고대 유적의 경우는 자국에서만 진행한 측정 연대는 국제 학계의 공인을 받기 어렵다. 따라서 캐나다, 미국, 프랑스 등 몇 개 선진국에 시료를 보내 탄소14의 반감기를 이용하는 ‘탄소14 연대 측정’을 받아 객관적으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는다. 이때 표본이 되는 목탄(탄화목) 등을 대상으로 측정하는데,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나이테 교정 연대’를 사용하여 보완한다. 이런 고난도의 과정을 거치면 학계에서 공식적인 ‘절대연대’로 인정받게 된다. 요하문명 각각의 고고학문화 연대는 이미 국제적인 공인을 받은 절대연대로 신뢰성이 높은 것이다.

 

다음으로 일반인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요하문명 지역이 건조한 사막 지대이거나 연평균기온이 낮아 고대인들이 거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문명지역은 요하 상류와 중류를 중심으로 넓게 분포하며,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그런데 요하문명이 꽃피던 시대에 이 지역은 사람이 살기 좋은 기온대의 지역이었다. 동아시아 계절풍이 만주까지 올라왔었고, 물도 풍부하고 기온도 높았으며, 습도도 높았다. 과거 1만 년 동안의 기온 변화를 다룬 자료 및 중국과학 기후 자료 등을 분석하여 정리한 우실하 교수는 B.C. 6000 ~ B.C. 3000년, 즉 요하문명 시기에 이 지역은 전체적으로 현대 한반도 중부지역과 비슷한 기후 조건으로 문명이 꽃피기에 적합한 곳으로 보고 있다. 

 

이제 황하문명과 구별되는 요하문명의 중요한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자.

이 문명에서는 ‘최초의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다. 이 토기는 초기 격자문에서 평행한 짧은 선 모양을 한 방향으로 그리거나 물결모양으로 그린 토기들이 많았다. 그런데 한반도 신석기시대 유적인 강원도 고성군의 문암리와 오산리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토기가 발굴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황하문명에서는 이런 형태의 토기가 발굴되지 않고 있다.

 

또한 요하문명 지역에서는 이른 신석기시대의 많은 옥기(玉器)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런 옥기문화를 낳은 세석기문화는 황하문명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시베리아 남부→만주→한반도’로 이어지는 북방문화계통이다. 즉 요하문명은 중석기시대 세석기문화의 후속으로 발달된 옥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전형적인 북방문화 계통이다. 요하문명의 꽃이라 불리는 ‘홍산문화’에서는 신분에 따라 무덤에서 발견되는 옥기 부장품의 개수가 달라 이 시기에 권력이 분리되고, 신분이 나누어진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옥기들은 한반도의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는데, 앞의 문암리유적에서 같은 모양의 옥기가 발견되었다. 

 

돌을 쌓아 만드는 적석묘는 토광적석묘, 석관적석묘, 계단식 적석총으로 발전해간다. 이 중 가장 발전된 ‘계단식 적석총’은 홍산문화 시기에 시작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황하문명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요하문명 시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다양한 적석묘는 홍산문화 시기에 대표적인 묘제(墓制)로 발전하며, 후대에는 몽골, 중앙아시아, 스키타이시대, 흉노, 돌궐 등의 묘제로 이어지며, 나아가 고조선‧고구려‧백제‧가야‧신라‧일본 지역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복골(卜骨)은 동북아시아 최초의 것이다. 복골은 불에 구워서 점을 치는 데 이용한 뼈를 이르는 말이다. 기원전 5000년경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황하문명 지역에서는 이보다 1000년 후에 시작되어, 상나라 시기에 가장 번성하지만 주나라 이후에는 사라진다. 그러나 만주 지역에서는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한반도 지역에서는 함경북도 무산 일대에서 골복이 발견된 이후 철기, 삼한, 삼국, 통일신라시대까지도 이어지고, 일본의 야요이시대로 전파된다.

 

요하문명 후기문화권에서 ‘치를 갖춘 석성’이 발견된다. ‘치’는 석성 중간중간에 돌출부를 쌓는 것이다. 이러한 석성은 요서 지역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여 고구려까지 이어졌으며, 고구려 석성의 독특한 특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석성을 쌓는 과정에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외부 집단과 전투를 벌일 정도로 인구수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치를 갖춘 석성’은 황하문명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 시기에 이미 이 지역이 국가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주장을 종합해 보면, 서요하지역에서 ‘하나라보다 앞서는 문명고국(文明古國)’을 건설했으며, 이후 이 지역의 고대 민족들이 남쪽으로 이동해서 하나라를 대체하는 상나라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고대 민족은 한민족(漢民族)의 조상인 황제족으로 보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는 국가명을 붙일 수 없어 다소 막연하게 표현하지만, 우리민족 입장에서 볼 때는 국가 형태를 갖춘 ‘단군조선(檀君朝鮮)’을 떠올릴 수 있다. 신용하, 우실하 등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이 문명고국이 초기의 단군조선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비파형동검, 고인돌, 마송리식토기 등을 고조선을 상징하는 유물로 보고 있다. 이 가운데서 비파형동검은 가장 중요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이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으로 본다. 많은 사람들은 비파형동검의 분포지역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출토된 비파형동검의 숫자는 한반도 지역보다는 요서, 요동이 훨씬 많으며 시기도 빠르다. 이렇게 볼 때 중국 학계에서 말하고 있는 ‘문명고국’은 단군조선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중국에서는 2015년 ‘도사유지’ 발굴 결과를 종합하여 발표하며, 이곳이 전설로 전해오던 요임금의 도성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곳이 중국 민족의 첫 도성이 된다. 중국에서는 요가 황제에 오른 해를 ‘기원전 2357년’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를 바탕으로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개국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요나라 건국과 비슷한 시기이다. 요임금이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음이 밝혀졌으니, 단군 또한 실재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요하문명은 황하문명과는 다른 세력이 주도한 문명이다. 홍산인들 중 일부가 남하하여 황하문명을 주도한 세력들과 연합하면서 독자적인 황제족으로 세력화했다고 볼 수 있다. 남아 있던 홍산인들은 토착세력이었던 곰토템족으로, 환웅족이 이주해오면서 단군조선의 일부인 웅녀집단으로 합류한 세력이다. 따라서 홍산인들은 황제족과 단군조선 공동의 조상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요하문명은 ‘동북아시아 공통의 시원문명’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거칠게나마 만주 일대에 황하문명보다 앞선 시기에 요하문명을 주도한 세력이 있었으며, 이들은 황하문명과는 이질적인 문화 전통을 가진 북방 세력이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요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는데, 앞에서 검토한 대로 이 고대국가는 단군조선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 학계에서는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을 자신들의 조상인 황제족의 후예로 보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중‧일‧몽골 등이 함께 공동연구를 진행하여, 요하문명이 동북아시아 공통의 문명의 기반임을 확인시켜야 한다. 객관적, 실증적 연구를 통해 중국의 역사공정에 대응하는 동시에 우리 문화의 시원인 요하문명의 위상을 바로세워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이 글은 우실하 교수의 『요하문명과 한반도』, KBS 역사 스페셜(2009.8.29.) 내용을 참고하여 서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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