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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을 다시 만나다

유철편집국장, 최은영기자 | 기사입력 2023/10/10 [04:36]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을 다시 만나다

유철편집국장, 최은영기자 | 입력 : 2023/10/10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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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 지배를 벗어나서 1945년에 광복을 얻어낸 것은 동포들의 열망과, 끊임없는 투쟁 그리고 앞장서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평생 광복을 위해서 애쓰신 수많은 순국선열의 거룩한 피와 땀과 희생 덕분이다.

  2023년 광복 78주년을 맞이하여, 먼 이국땅에서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후세 교육과 개척정신 고취를 위해 노력하신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과, 최재형 선생의 업적을 알리고 이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기념사업회’의 활동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동 기념사업회 문영숙 이사장님을 찾아 뵙고 귀한 말씀을 듣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 편집자 주

 

Q: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본인 소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저는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고.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통해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작가가 되어 주로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역사를 소재로 책을 써왔습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님 책도 2014년에 냈는데 그 책이 인연이 되어 현재 최재형 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Q: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를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A: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는 2010년에 기업인 김창송, 전상백, 박춘봉, 김수필 등 네 명이 러시아 연해주에 가셨다가 최재형 선생님에 대해서 들으시고 또 그곳 고려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기도 하면서 열악하게 사는 모습을 보시고 이들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하시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분들은 여행에서 돌아오신 후 2011년에 최재형 선생의 이름을 따서 “최재형 장학회”를 발족하셨습니다. 그 이후 2015년에 사단법인을 만들었고, 2018년에 국가 보훈부 산하 기념사업회가 되었습니다.

 

해외 동포 중에서 가장 고난을 겪은 동포들이 고려인이에요. 나라가 힘이 약해 먹여주지 못해서 기근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터전을 일구고 살았는데, 그마저도 스탈린에 의해서 1937년 고려인 전체가 낯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게 되잖아요. 그곳에서는 조국과 단절되어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심한 고난을 겪은 사람이 고려인이에요. 그래서 우리 사업회에서는 고려인과 최재형 선생님 후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고려인의 정착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누적 장학생 수가 100여 명이 넘습니다. 아울러 최재형 선생 선양 사업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Q: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에서는 장학생 지원 사업뿐만 아니라 다른 귀한 일도 많이 하시지요?

A: 우리 기념사업회에서는 여러 가지 최재형 선생 업적을 선양하기 위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올해 7회째인 독후감 대회도 열고 있습니다. 독후감 대회를 통해서 특히 청소년들에게 이 분의 삶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재형 선생이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서 현격하게 서훈이 낮아서 서훈 상향 서명 운동도 벌이고 있습니다.

 

Q: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에 대해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조선 총독을 저격할 때 사용한 권총을 준비해 주신 분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에 대해서 좀 더 소개해 주세요.

A: 최재형 선생은 흔히 독립운동가라고만 알고 있는데 사실 선생께서는 글로벌 리더 역할을 많은 분야에서 했어요. 우선 기업가로 성공을 거두어 동양의 카네기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버셨고요. 또 한인 교육을 위해서 32개의 소학교를 세우셨고 러시아 얀치헤의 군수가 되어 행정가로도 명성이 높아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도 한인 대표로 참석하셨어요. 또 로마노프 황가 300주년 기념식에도 한인 대표로 참석을 하셨어요.

 

특히 러일전쟁 이후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의병을 모으고 1908년 안중근 의사와 이범윤 간도 관리사 또 헤이그 특사 중에 이위종과 함께 국외 최초의 독립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총장이 되었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도 최재형 선생 주도 아래 계획되었고, 안중근 의사에게 권총을 사주고 자기 집에서 사격 연습을 하게 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 거사 후에는 국제 변호사를 뤼순으로 보내 구명운동을 했고 안중근 의사 순국 후에는 안중근 가족도 돌보셨지요.

 

Q: 최재형 선생을 당시 동포들이 “페치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A: 최재형 선생은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어요. 당시에는 함경도 지방에 기근이 굉장히 심해서 다른 조선인들처럼 두만강을 건너가서 살다가 집안 사정 등으로 인해서 가출하여 포시예트라는 항구로 가셨다가 마음씨 좋은 상선 선장 부부를 만나고 이들의 도움으로 11살부터 17살까지 6년 동안 배에 태우고 전 세계를 두 번이나 여행하면서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기업가로서의 경험을 충분히 쌓아 그야말로 글로벌 청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후에 최재형 선생님은 군납업 등 사업을 하는 기업가가 되셔서 그곳 동포들을 성심껏 돕는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 동포들에게 따뜻한 난로 역할을 해 주니까 동포들이 그를 최 페치카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해요. 아시는 대로 한인들의 난로라는 뜻이죠. 

 



Q: 올해에는 최재형 선생님 묘 복원식과 함께, 키르기스탄에서 모셔 온 부인 엘레나 여사님 유해를 합장해 드리는 행사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거행했다고 들었습니다.  

A: 원래 국립서울현충원에 최재형 선생의 묘가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보상금을 노린 가짜 후손과 연루되어 최재형 선생의 묘가 멸실되어 버렸어요. 2019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우리 사업회에서 최재형 선생 후손들과 묘 복원 서명운동도 하고 노력을 한 결과 올해 국가보훈부에서 법이 개정되었고 최재형기념사업회에서 키르기즈공화국 공동묘지에 있는 최 엘레나 여사를 모셔 와서 역사적인 합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하는데 많은 국민들이 동참해주시고 후원하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Q: 2020년부터 최재형 선생의 고귀한 페치카 정신과 뜻을 이어가는 분들을 선정해서 ”최재형 상”을 시상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A: 우리 기념사업회에서는 최재형 순국 100주년인 2020년에 제1회 최재형 상을 시작했어요. 현지에서 고려인들을 위한 신문을 발간한다든지 또 어떤 모임을 만들어서 최재형 정신을 실천한다든지 하시면서 최재형 선생의 페치카 정신에 합당한 귀한 일을 하시는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해서 1천만 원의 상금을 드리고 있습니다. 올해는 이태석 재단 이사장님이 본상을 받았습니다. 이태석 신부와 최재형 선생은 지역은 다르지만 같은 나눔과 봉사와 헌신을 실천하셨다는 점에서 두 분이 공통점이 있어서 선정했습니다.

 

Q: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에서 앞으로 계획하고 계신 일을 말씀해 주세요.

A: 우선 목표로 했던 최재형 묘 복원은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고요. 지금 계속 국가보훈부에 요청하는 것이 서훈 상향입니다.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대부 역할을 했는데도 최재형 선생만 3등급인 독립장으로 가장 낮습니다. 이는 1962년 서훈 당시 후손도 없었고 소련 시절이라 제대로 자료가 반영되지 못해서 현격히 낮은 서훈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 이후 적용되지 않은 업적을 국가보훈부에 보낸 상태고요. 어떻게 든 최재형 선생의 누락된 업적들이 제대로 반영되어 서훈이 상향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최재형 기념관을 국내에 세워야 하죠. 왜냐하면 상하이 임시정부가 생기기 전까지 독립운동의 발판이 러시아 연해주에서 다져졌습니다. 그런데 현재 독립운동가 기념관을 보면 상해임시정부 위주로 되어 있고, 러시아 독립운동사는 묻혀 있고 잊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묻힌 러시아 독립운동사와 함께 최재형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꼭 생겨야 합니다. 장학사업을 지속하면서 최재형 기념관 건립을 위한 사업도 해야 하고 최재형의 사료가 부족한 만큼 중앙아시아 러시아에 흩어져 사는 후손과 동포들을 통해서 사료 확보도 노력해야 합니다.

 

Q: 이사장님께서는 문인이셔서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카레이스키, 끝없는 방랑」 등 많은 책을 내셨습니다. 이사장님 저서에 대한 말씀을 해주세요.  

A: 저는 50이 넘어서 글을 통해 제2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시를, 그 다음에 수필을 썼고 그러다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창작 공부를 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특히 청소년들이 알아야 하는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책을 많이 냈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수난사에 중점을 두고 쓴 책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위안부, 강제징용. 멕시코 이민, 카레이스키, 최재형, 안중근 등등 제가 쓴 책 때문에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라는 별명을 붙었습니다. 앞으로도 고려인들을 소재로 더 쓸 생각이고요. 역사를 소재로도 쓸 것들이 많습니다. 현재 동화 소설 그림책 등등 50여 권이 되는데요. 내 정신이 살아있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쓰려고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이사장님의 인생관,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귀한 말씀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지금은 영상 시대라고 해서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때이지만 그래도 깊이 있는 독서는 인생관 정립이나 사고의 깊이, 집중력과 분석력 신장을 위해서 중요합니다.

 

그리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가 지금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데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멕시코, 쿠바, 러시아, 중앙아시아, 독일, 일본 등에서 고난의 역사를 이어간 소위 디아스포라 관련해서도 모든 사람들이 많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찬란한 문화를 갖고 있고 또 수난도 많이 당했지요.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최재형 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최재형 선생은 정말 청소년의 본이에요. 전 세계 대양을 돌면서 글로벌한 야망을 키우셨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실천하셨거든요. 최재형 선생만큼 그렇게 글로벌 리더 역할을 하신 분이 없다고 생각해요. 더구나 그 어려운 시대에 말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이분의 삶을 본받고 또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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