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는 국가 지정 보훈 단체이다. 이날 먼데이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광복회 충북지부에서는 ‘장기영’ 지부장과 ‘이정희’ 사무국장, 전 지부장이신 86세 고령의 김원진 선생을 만나 뵐 수 있었다.
먼저 장기영 지부장은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대한민국은 친일 풍토에 빠져 국가 정신이 흐릿해졌다’고 언급했다. 특히 장 지부장은 과거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이 겪었던 각종 고초를 상기하며, ‘한국 사회 곳곳에 물든 친일 분위기를 강력히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전 지부장이었던 김원진 선생 역시 독립 운동을 벌였던 자신의 부친을 언급하며 한국 사회가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말을 보탰다. 백발이 되신 김원진 선생님은 ‘선친이신 김창도 선생께서는 1919년 3.1 운동이 당시, 평양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대규모 만세운동에 동참하셨다’ 고 말씀하셨다. 김창도 선생께서는 ‘이동녕, 이회영 선생 등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서, 조교 역할을 맡아 독립군을 양성하셨다’고 전했다.
김창도 선생께선 대표적인 독립전쟁인 ‘봉오동 전투에서 승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고, 이어 청산리 전투가 벌어지던 김좌진 장군 진영에 합류하셨으며, 이 전투에서 일본군을 궤멸시켰다’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김창도 선생께서는 김좌진 장군을 따라 중국 흑룡강 성으로 함께 이동했지만 얼마 못 가서, 김 장군께서 일본 군부에 의해 하얼빈에서 피살당하자, 다시 돌아오셔서 신흥무관학교 8기로 입학하셨고, 이후 독립에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독립전쟁을 위한 전투 부대원 교육에 참여하셨다고 아드님은 말씀을 이어가셨다. 이후에 소련으로 건너가신 김창도 선생께서는 본격적인 전투 경험을 늘리셨다’고 아드님은 전하셨다. 그러나 공산군과의 적대관계로 인해 소련에서 중국으로 건너가셨는데, ‘그곳에서도 공산군과의 충돌이 여러 차례 있으셨다’ 아드님은 말씀하셨다.
해방 정국 때 북한 정부가 소련 말을 할 줄 아는 김창도 선생에게 ‘북한 정부 설립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나 거절하셨으며’, 이후 김창도 선생께서는 ‘한 달 간의 옥고를 죄 없이 치르셨다’고 아드님은 말씀을 이어갔다.
이후 김창도 선생은 남쪽으로 식속들을 인솔하셨다. 이 과정에서 자식들을 의롭게 키우신 김원진 선생의 어머니마저 장티푸스로 돌아가시고 말았다며 눈물이 글썽이셨다. 선생 가족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끝없이 각종 고초를 겪었다고 아드님이신 김원진 선생께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에 대해 ‘이정희’ 광복회 충북지부 사무국장은 ‘독립유공자의 유족 및 후손들이 너무나도 힘든 인생을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들은 대부분은 ‘선친께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가정을 돌보지 못했던 터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아주 힘들었고, 경제적으로도 극한의 곤궁에 처해야 했다’. 고 가슴 아파했다.
실제로 김창도 선생의 아드님 김원진 선생께서도 아주 어린 나이에 구두닦이, 신문 팔이, 건축 현장 노동자 등의 어렵고 힘든 삶을 이어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이정희 사무국장은 이처럼 열악한 현실에 마주할 때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이를 알면서도 국내외적 복잡한 상황 때문에 외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 분들의 노고와 헌신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며, 독립투사의 후손에게 큰 혜택을 주지도 못하고, 작은 배려도 못하면서 그 거룩한 뜻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작금의 세태가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장기영’ 지부장은 이 분들 외에도 발굴되지 못한 수많은 독립유공자 및 후손들이 많이 존재하며 남은 생애를 ‘이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비장한 각오로 마무리했다. <저작권자 ⓒ 먼데이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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