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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 최석정의 『경세훈민정음도설(經世訓民正音圖說)』을 제 자리에(대한민국으로)

민병준 | 기사입력 2024/10/16 [04:04]

명곡 최석정의 『경세훈민정음도설(經世訓民正音圖說)』을 제 자리에(대한민국으로)

민병준 | 입력 : 2024/10/16 [04:04]



사물은 각각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사물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마침내 잊혀진다. 역사를 통틀어 보면 이런 일은 너무나 많다. 그런데 그 사물이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제 자리를 찾아 주어야 하며, 동시에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명곡 최석정의 『경세훈민정음도설(이하 경세도설)』이 바로 제 자리를 찾아 주어야 할 사물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처음으로 학구적, 음운학적으로 연구한 것으로 평가되는 문헌임에도, 현재 일본의 교토대학 서고 깊은 곳에 방치된 채 잊혀지고 있다.

 

『경세도설』은 조선 숙종 때 명재상인 명곡(明谷) 최석정 선생(1646~1715)이 만년에 저술한 연구서다. 명곡과 더불어 병와 이형상, 여암 신경준 등도 빼어난 언어학자들이었다. 한글에 대한 이론적 연구서는 1446년 세종이 8명의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이루어낸 ‘훈민정음해례’가 처음이었다. 이후 350여 년이 흘러 훈민정음을 본격 연구한 학자는 조선 후기인 숙종 때 최석정이었다. 이상규 경북대 교수는 “(그는) 세종 이후 조선시대 각종 학문 연구의 중흥을 이끌어 낸 업적이 크다. 그는 노장학과 양명학, 청나라로부터 밀려든 청학과 실학의 기풍을 융합해 신유학의 질서를 잡은 대학자다. 그로 인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 거의 350여 년간 중단되었던 훈민정음 연구가 새롭게 재개되었다. 이는 조선 전기와 달리 변화된 조선의 시대정신과 사상적 조류를 읽어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연구 업적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경세도설』은 책으로 인쇄되지 않았었다. 선생의 `필사고본(筆寫稿本)' 영인본으로만 전해지는 이 저술은 국어학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훈민정음 창제 이래 나온 최초의 한글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어학사에서는 ‘훈민정음해례’ 후 305년만인 1750년 나온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최초의 한글 연구로 꼽고 있다. 하지만 선생의 『경세도설』은 이보다 앞선다. 박영민 고려대 교수는 “그동안 18세기 최고(最古) 연구서로 분류됐던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보다 40년가량 앞서는 책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이 책을 처음 발견하고 해제서를 발간한 고(故) 김지용 전 청주대 국문학과 교수는 최석정 선생이 이 책을 저작한 시기를 1701년에서 선생이 작고한 1715년 사이로 추정했다. 선생은 말년인 1710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진천 초평에 기거한다. 이후 70세인 1715년 서거해 지금의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야산에 묻혔다. 고(故) 김 교수는, 선생이 파직돼 고향에 기거하던 이 시기를 『경세도설』 저작 시기로 추정하면서, 현대 디지털시대에 가장 적합하고 우수한 문자로 평가받는 한글에 대해 이미 300년 훨씬 이전, 선생이 입증하고 있음에 학술적 가치를 부여했다.

 

놀랍게도 선생은 『경세도설』에서 훈민정음 28자를 초성과 중성, 종성, 소리의 높낮이(音高低), 발음모양(開閉)으로 나눠 모두 1만 2,288자로 조합됨을 밝혀냈다. 여기다 `ㅈ', `ㅊ'과 순경음(`ㅱ, ㅸ, ㅹ, ㆄ')을 합치면 그 수효가 더 늘어난다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 영·정조 때 이조판서였던 이계(耳溪) 홍양호(1724~1802)는 자신의 저술인 『이계집(耳溪集)』 10권 ‘경세정운도설서’에서 최석정 선생의 저술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세종 장헌대왕께서 천지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 알으시고 28자를 창제하시고 이를 더 늘리어 펴 놓으면 세상 천하의 글을 모두 표현할 수 있어 어린이나 부녀들도 익히기 쉬우니 서계문자(書契文字, 한자)를 만든 태호 황제와 더불어 공적이 큼이로다. 그러다 뛰어난 문신 최석정 같은 학자가 있어 훈민정음의 뜻과 이치를 연구 발휘하니 그 공이 훌륭하고 대단하구나!” 그러나 홍양호의 이런 기록에도 『경세도설』은 후대에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해 왔다.

 

저술이 책으로 인쇄되지 않은 채 강화도 전등사 마니산 고분에 필사본으로 200여 년간 보관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인 1910년 조선총독부에서 전등사에 보관된 2,160권의 서적과 함께 수탈해 가면서 역사 속에 묻혔다.

 

이후 『경세도설』은 반세기 넘게 교토대학 서고에서 수장돼 곰팡이가 슬고 있는 지경이다. 고 이숭녕 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홍양호의 『이계집』을 통해 최석정의 저서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 본서를 볼 수 없어 유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다행히 이 저술은 지난 1961년 고 김지용 청주대 교수에 의해 300년이 지난 뒤에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당시 교토대학 서고 도서 목록을 조사하던 김 교수는 『경세도설』 등 희귀 문헌들을 마이크로 필름에 담고 나서, “필자가 촬영하고 난 다음엔 폴싹 무너져서 전모를 알아보기 어렵게 됐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오랜 세월 훼손돼 벌레가 집을 들고 지질마저 사그라든 것이다. (충청타임즈)

 

이렇게 발견된 최석정 『경세도설』은 1962년 동아일보의 ‘경세훈민정음도설 책을 찾았다’는 기사로 국내에 알려졌다. 1973년엔 괴산 출신인 고 김석득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가 동방학지에 ‘최석정의 경세훈민정음도설-국어학상의 의미’란 제하의 논문을 싣기도 했다. 선생을 재조명한 충청타임즈는 한글날 특별기획을 통해 ‘최석정 선생 역사 세우기’에 대한 공론화를 지역사회에 거듭 제안했다.

 

하지만 선생의 『도설』에 대한 관심은 아직도 미흡한 게 현실이다. 김지용 교수는 “필사본이 유일해 학자들의 눈에 잘 띄지 못했던 데다 국내 학자들의 관심과 연구 노력이 부족했다.”고 후대의 무관심을 자책했다. 한글학회 김슬옹 이사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훈민정음에 대해 학문적으로 체계 있게 연구된 최초의 훈민정음 연구서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한 후, “원본이 국내에 존재하지 않은 데다 훈민정음의 음운적 연구가 한문으로 이뤄지다 보니, 학술적 가치에 비해 후대 한글학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많이 이뤄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경세도설』은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 『경세도설』이 있을 곳은 일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다. 또한 국어학자들의 활발한 연구를 통해 잊혀져 가는 『경세도설』의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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