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가을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느껴지는 쌀쌀한 기운은 우리의 무뎌진 감각을 깨웁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서서히 몸은 움츠러들지만, 그래서인지 마음은 오히려 살며시 문을 여는 때인 거 같습니다. 흔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독서도 공부입니다. 그렇다면 가을은 공부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바로 나를 공부하기에 적기인 셈입니다.
천고마비(天高馬肥)는 가을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사자성어지만, 이때 살찌는 것은 우리 마음이 되어야 하겠지요. 공부하면서 마음의 살찜을 느끼고 있나요? 제가 보기에 우리들의 마음은 여전히 빈곤 상태입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으로 따지자면 아마도 우리나라 학생들은 누구보다 마음이 풍요로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이 가난한 까닭은 ‘공부 아닌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어떤 이들은 학창 시절의 공부를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고 진로를 선택하기 위해서 ‘즐겁지 않은 공부’를 참고 견뎌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와 같은 식의 공부는 삶에 대한 절박함에서라기보다는 시대 조류에 휩쓸려 단순히 정보를 효율적으로 저장하는 측면이 짙습니다. 그러나 입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공부 방식은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안타깝지만, 그런 공부에 참여하는 중이라면 어리석게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마치 누가 더 자기 자신을 잘 상실하느냐가 입시 경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지금, 우리는 더더욱 일회용 정보에 익숙해집니다. 사실, 삭제가 예정된 채로 소비되고 마는 이야기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우리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질 정보에 불과합니다. 친구들이 서로 링크를 걸어주는 글들도 그렇지요. 맛집에 대한 정보는 또 다른 맛집에 대한 정보로 대체됩니다. 그 주기는 더욱 빨라집니다. 그러나 한 분식점에서 만난 친구와의 인연은 이야기가 되고 추억을 만듭니다. 단순히 어느 식당에서 무엇을 먹었다가 아니라, 친구에 대한 인상에서 출발하여 그 식당에서 전개된 일련의 이야기가 기억되기 마련입니다. 함께 오순도순 떠들며 떡볶이를 먹은 친구는 대체될 수 없는 유일회적인 사건으로, 다시 못 올, 오직 그 시간에만 머무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초침의 움직임으로 측정되는 시간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자연 안에 존재하는 여타의 타자들과의 만남과 무관하게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간 말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초침 소리와 적막한 어둠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서사적 존재로서 각자가 마주한 시공간 안에서 그것을 감각하고, 또 그러한 경험이 반영된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보의 시침으로 돌아가는 ‘수능 시계’는 학생들에게 멈춘 시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능 시계’는 학생들에게 긴장 상태를 지속시킵니다. 이완의 상태를 허락하지 않는 한 이야기가 숨 쉴 틈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공부하고 있나요? 정보입니까, 서사입니까? 독일에서 활동 중인 국내 철학자 한병철은 근대 이후 우리의 일상을 서사적 위기라고 진단합니다. 금방 사라질 정보의 과잉 속에서 소비주의적인 삶의 형식이 ‘서사’를 목 조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결코 정보는 이야기로 연결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정보만 있고 이야기는 없는 삶을 살게 될까 걱정입니다. 알맹이 없는 삶이지요. 결코 정보에는 감탄과 경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철학자 한병철에 따르면,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지 못하는 사람은 존재를 망각하고 자신의 아우라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삶에 대한 경탄과 신비를 되찾는 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의 이야기를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무르익어 가는 가을, 기억 속 어딘가 비밀처럼 자리하고 있는 나의 이야기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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