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동아지도 (2007) 한때 ‘요하문명’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2009년 KBS ‘역사스페셜’이 방영된 이후였다. 당시 한겨레 신문에서는 학생들이 교과서에 신화로만 나오는 단군의 실체에 대해 묻고, 우리 문화와 연결돼 있는 요하문명을 왜 배우지 않는지 묻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수천 년 전 만주 일대에서 꽃을 피웠던 요하문명은 우리 민족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최근 새로운 유적의 발굴과 역사학, 고고학 등의 발전에 힘입어 우리의 시야를 한반도 너머 만주 일대까지 넓힐 때가 되었다.
만주 벌판을 흐르는 강 ‘요하’, 1980년대 초에 이 요하강 유역인 요서에서 큰 규모와 발달된 단계를 보이는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문명은 중국 만리장성 밖에 위치해 있었는데, 황하문명보다 앞선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중국 학계에서는 이 고대문명을 ‘요하문명’으로 명명하였다. 만일 이 요하문명의 주인이 우리 조상이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다면, 우리 민족의 뿌리인 시원문명(始原文明)을 찾아내는 일이 될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황하문명보다 빠른 문명의 발굴은 큰 충격이었다. 중국은 이 문명을 제5 문명으로 확정했다. 황하문명이 가장 앞선 문명이라는 주장을 스스로 뒤집는 결과였다. 그런데 이들은 이 문명의 주도 세력이 자신들 조상이며, 따라서 이들이 이룩한 역사는 모두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 이 만주 일대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되고 만다. 이미 중국은 역사 교과서에서 부여‧발해‧고구려를 중국사로 가르치고 있다. 특히 2017년 시진핑이 트럼프와의 회담에서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라고 한 발언은 충격적이다.
요하문명 지역은 우리 민족의 상고시대의 활동 무대였다. 고조선‧예맥‧부여‧고구려 등은 이 지역에서 삶을 이어간 우리의 고대국가들이다. 요하문명의 각종 신석기-청동기시대 유적은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발굴되었다. 현재 우리 교과서에는 비파형동검 등이 출토된 요서 지역 일대를 ‘고조선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학계에서는 이 문명에 대한 연구가 부진한 실정이다. 사학계의 여러 갈등이 문제를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요하문명이 우리의 상고사‧고대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역사학자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므로, 앞으로 우리 문명의 시원을 밝히는 데 힘을 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요서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이른 시기에 문명이 발생했다는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고대문명의 연대 측정은 매우 중요하다. 고대 유적의 연대 측정은 국제 학계의 공인을 받아야 한다. 즉 선진국에서 ‘탄소14 연대 측정’을 과정을 거치며, ‘나이테 교정 연대’를 사용하여 보완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공식적인 ‘절대연대’로 인정받게 된다. 요하문명의 유적 연대는 국제적인 공인을 받은 절대연대이다. 다음으로, 요하문명에 대해서 이 지역이 대부분 사막 지대이거나 기온이 낮아 고대인들이 거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과거 1만 년 동안의 기온 변화 자료를 연구한 우실하 교수는, 요하문명 시기에 이 지역은 현대 한반도 중부지역과 비슷한 기후로 보고 있다.
황하문명과 구별되는 요하문명의 중요한 특징은 무엇일까?
이 문명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다. 그런데 강원도 고성군의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토기가 발굴되었다. 황하문명에서는 이런 형태의 토기가 발굴되지 않고 있다. 또한 신석기시대의 옥기(玉器)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런 옥기문화는 황하문명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시베리아 남부→만주→한반도’로 이어지는 북방문화계통이다. 돌을 쌓아 만드는 적석묘는 홍산문명 시기에 시작되는데, 이런 것들이 황하문명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요하문명 시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다양한 적석묘는 홍산문명 시기에 대표적인 묘제(墓制)로 발전하며, 후대에는 몽골, 중앙아시아, 흉노, 그리고 고조선‧고구려까지 이어진다. 요하문명 후기에는 석성 중간중간에 돌출부를 쌓는 ‘치를 갖춘 석성’이 발견된다. 이러한 석성은 요서 지역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여 고구려까지 이어졌는데, 황하문명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 시기에 이미 이 지역이 국가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요하지역에서 ‘하나라보다 앞서는 문명고국(文明古國)’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이 문명고국이 초기의 ‘단군조선(檀君朝鮮)’일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역사 교과서에서는 ‘비파형동검’ 등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으로 본다. 그런데 출토된 비파형동검의 숫자는 한반도 지역보다는 요서, 요동이 훨씬 많으며 시기도 빠르다. 이렇게 볼 때 중국 학계에서 말하고 있는 ‘문명고국’은 단군조선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서는 ‘요’가 황제에 오른 해를 ‘기원전 2357년’으로 확인했다. 고조선의 개국이 기원전 2333년이므로, 요나라 건국과 비슷한 시기이다. 요임금이 실제로 존재했음이 밝혀졌으니, 단군 또한 실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요하문명은 황하문명과는 다른 세력이 주도한 문명이다. 홍산인들 중 일부가 남하하여 황하문명 세력과 연합했으며, 남아 있던 홍산인들은 곰토템족으로, 환웅족이 이주해오면서 단군조선의 웅녀집단과 합류한 세력이다. 따라서 홍산인들은 고대 중국과 단군조선 공동의 조상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요하문명은 ‘동북아시아 공통의 시원문명’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학계에서는 요하문명을 자신들의 조상인 황제족의 유산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중‧일‧몽골 등이 함께 공동연구를 진행하여, 요하문명이 동북아시아 공통의 문명임을 확인해야 한다. 객관적 연구를 통해 중국의 역사공정에 대응하는 동시에 우리 문명의 시원인 요하문명의 위상을 바로세워야 한다. <저작권자 ⓒ 먼데이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