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도둑벌 이야기 ... 자연과 사회의 야만성

김승윤(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보) | 기사입력 2024/09/05 [11:42]

도둑벌 이야기 ... 자연과 사회의 야만성

김승윤(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보) | 입력 : 2024/09/05 [11:42]



광복절이 지나자 농장에 물봉선 꽃이 피었다. 아직도 꽃을 피우고 있는 봉숭아(봉선화)와 많이 닮았다. 동산에서 두 가지 봉선화를 동시에 보고픈 꿈은 이루어졌다. 물가를 좋아해서 물봉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듯한 이 녀석들은 동산의 계곡을 따라 무성하게 자리를 잡아서 한동안 필 태세다. 물봉선 꽃의 등장이 더위가 사그라지는 신호가 아닌가 여겼지만, 기후변화로 얼마나 지구가 열을 받았는지 종다리라는 태풍도 가볍게 튕겨버리고, 다시 무더위가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벌들은 계속되는 더위를 피해서 벌통 밖으로 나와 뭉치고 있다. 장마 때부터 산야에는 꿀이 마르기도 했지만, 요즈음 같은 더위에는 그 부지런한 꿀벌들도 일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이럴 때, 즉 무밀기가 계속될 때, 벌지기들이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이 도둑벌(도봉)이다.

 

도둑벌은 폭염에도 정신이 번쩍 들 만한 무서운 존재이다. 도둑벌(도봉)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외부에서 양봉장으로 침입해오는 강도 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도둑벌은 가까이에 있다. 내가 키우는 모든 벌이 상황에 따라 도둑벌이 될 수 있다. 외부에 먹이가 없는 시기가 계속되고, 양봉장 내의 약한 벌통에 먹이(꿀)가 쌓여 있다는 것이 노출되면, 주위의 벌들이 이 벌통을 집중 공격하여 꿀을 약탈해 간다. 이렇게 약탈을 하는 벌들 또는 그 현상을 도둑벌(도봉)이라 부른다. 도둑벌들은 표적이 된 벌통을 깨끗이 털어 가는데, 꿀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꿀이 묻은 밀랍까지도 뜯어가 버린다. 몇 년 전 도봉이 끝난 벌통 안을 들여다보니, 벌통 바닥에는 벌들의 시체와 뜯어가다 남겨진 밀랍가루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여왕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도 없었다. 또 도봉이 한참 진행 중인 벌통을 열어보니, 엄청난 윙윙 소리와 함께 약탈에 열중하고 있는 광기어린 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인간의 역사에서도 수없이 벌어졌던 전쟁과 약탈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이 도둑벌에 대하여 더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도봉 당하는 벌통에 있는 벌들의 행동이다. 처음에는 자기 집을 보호하기 위하여 싸운다. 그러나 방어선이 뚫리고 본격적인 약탈이 시작되면, 남아 있던 벌들도 도둑벌의 약탈 행위에 동참한다. 힘세고 운 좋은 놈들만 약탈에 성공한다. 꿀을 뱃속에 채우고 나간 벌들은 다른 벌통으로 간다. 놀랍게도 꿀을 가득 채우고 들어오는 벌들은 경비벌이 잘 받아준다고 한다. 사람사회에서도 재물을 많이 갖고 들어오는 난민들은 환영하지 않을까? 승자만 살아남는 씁쓰레한 결말이다.

 

이 야만적인 도봉 행위는 자연에 꿀이 풍부한 유밀기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무밀기일지라도 벌지기들이 적절히 먹이를 공급하고, 약한 벌들을 안전하게 관리하면 일어나지 않는다. 즉, 야만의 본능에 틈새를 주지 않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인간사회에서도 도둑벌들의 광기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다. 이른바 영혼까지 끌어다(영끌) 집을 사도록 부추기는 부동산 정책, 개미 투자자들의 탐욕을 자극하는 주가조작 등등. 모두 외부에서 꿀이 들어오지 않는, 비생산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현상일 뿐이다.

 

오늘은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인데, 폭염은 계속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기후변화라는 것도 인간의 야만적인 본능에서 시작된 것이다. 인간들이 경제개발이라는 눈앞의 꿀을 따기 위해 앞뒤 안 가리고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자기들이 사는 집인 지구가 망가져 점점 살기 어려운 곳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늦은 깨달음은 아닐지.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