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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節氣) 이야기: 입추 뒤에 말복?

민병준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4/09/11 [16:16]

절기(節氣) 이야기: 입추 뒤에 말복?

민병준 (논설위원) | 입력 : 2024/09/11 [16:16]

한낮에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나무 그림자 유난히 짙고 푸른 하늘이 높아만 간다.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문득 나선 새벽 산책길 풀잎에 맺힌 이슬이 영롱하게 반짝인다. 그 아름다움에 놀라 주변을 살펴보니, 늦게 피는 꽃들이며, 짓푸른 나뭇잎, 풀잎에 맺힌 이슬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그 아름다움이 새삼 놀랍기만 하다. 아, 우리가 무심한 중에도 자연은 이렇게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었구나! 하여, 성경 말씀에도 솔로몬의 영광이 작은 꽃의 영광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백로(白露), ‘흰 이슬’을 뜻하는 절기로 밤 기온이 내려가면서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힌다는 데서 말이다. 늦더위 속에서도 이슬은 내리고, 계절은 변하고 있으니, 절기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 생활은 절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절기를 통해 계절의 흐름을 가늠하곤 한다. “이제 처서(處暑)가 지났으니 무더위도 물러갈 거야, 모기 입도 비뚤어진다고 하잖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처(處)’가 ‘곳, 때, 머무르다’의 의미이며, ‘서(暑)’는 ‘덥다’의 의미이니, ‘처서’는 더위가 머물러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절기이다. 따라서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입추 뒤에 말복이 온다니, 이는 어찌 된 것일까? 올해 입추는 8월 7일, 말복은 8월 14일이었다. 둘 다 절기를 의미하는 말이라면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가을 절기 뒤에 여름 절기가 오다니..., 이는 잘못된 절기 배정이라 할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확인해 볼 사항이 있다. 입추나 말복 등은 모두 한자어이니 음력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농사에 도움이 된다 하여 음력을 사용해온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성급하게 결론을 말하자면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살표보자.

 

우선 입추나 백로 등의 절기는 태양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절기는 태양이 1년 동안 하늘을 도는 길, 황도상 위치에 따라 계절적 구분을 하기 위해 만든 달력이라 할 수 있다. 이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를 춘분점을 기점으로 15도 간격으로 총 24개의 절기로 나타낸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태양이 15도 이동할 때마다 온도나 계절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했고, 그 지점마다 적절한 명칭을 부여했는데, 이것이 바로 절기인 것이다. 이 24절기 중 ‘춘분, 추분, 하지, 동지’ 등은 계절의 변화를 의미하고, ‘소서, 대서, 처서, 대한’은 더위와 추위를, ‘백로, 한로, 상강’은 수증기의 응결, 이슬과 관련된 절기다.

 

그런데 한여름 삼복(三伏)은 지구의 공전궤도를 나눈 절기에는 속하지 않는다. 하지로부터 세 번째 오는 경일(庚日)이 초복이다. 그 다음 경일이 중복, 중복 다음의 경일이 말복이다. 여기서 경일이라 하는 것은 일진(日辰)을 따져보아야 한다. 일진은 앞뒤, ‘갑, 을, 병, 정’으로 시작하는 십간(十干)과 ‘자, 축, 인, 묘’로 시작하는 십이지(十二支)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경’은 십간에서 일곱 번째 오는 날이다. 중복은 초복 다음 10일, 말복은 초복에서 30일 다음에 온다. 따라서 가을 절기를 나타내는 입추 뒤에 말복이 오는 것이다. 이 삼복 기간에는 지속되는 더위로 몸도 마음도 지쳐 늘어지는 시기다. 우리 조상들은 더위를 이겨내는 지혜로 복날을 생각해 내고, 보양식을 챙겨 먹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에서는 태음력을 바탕으로 하고, 아쉬운 부분을 태양력으로 보완하는 태음태양력을 사용해왔음을 알 수 있다. 즉, 달의 차고 기욺으로 날짜를 계산하고, 태양의 움직임으로 계절을 파악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태음력은 달의 위상 변화에 주목하여 일력과 달력을 만들었는데, 춘하추동의 계절 변화는 고려하지 않았다. 회회력(이슬람력) 또는 순태음력이라 불리는데,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 되었으며, 세종대왕 때 정리하였다. 태양은 모습이 변하지 않고, 남중 고도 정도만 변화하는데, 그 변화 주기가 일 년으로 당시 천문학 수준으로는 이를 측정하고 정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비해 달은 날마다 위상이 변하며, 변화 주기도 한 달로 측정이 용이하였다. 또한 달의 변화를 측정하여 정리함으로써 달의 인력 변화와 관련이 깊은 수산업, 항해술, 천문학 등에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농사는 태양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24절기를 활용하여 보완했다. 따라서 태음력은 농사에 크게 도움을 준 것으로 볼 수 없다.

 

태양력은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강의 범람과 태양의 위치와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후 서양인들이 태양력을 받아들였고, 이집트는 현재 태음력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던 개화파의 노력에 의해 1896년 고종 때부터 태양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백로’ 절기에 보니, 이슬 더욱 영롱하게 빛나는 것 같다, 한낮의 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이제 ‘처서’도 지났는데, 오늘이 백로인데, 네까짓 더위가 언제까지 버티랴 하는 자신감과 위안이 생긴다. 그러고 보니 여름 내내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귀뚜라미 울음소리 높아질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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