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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고향

이종대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4/07/24 [16:45]

아버지의 고향

이종대 논설위원 | 입력 : 2024/07/24 [16:45]



어릴 적 나는 고향인 진천에서 할머니 두 분과 함께 살았다.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두 분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것은 바로 6.25 전쟁 때문이었다. 1.4 후퇴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UN군이 밀려 내려오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고향인 사리원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란행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평택쯤 이르렀을 때 가족들 앞에는 이미 눈앞에 포탄이 여기저기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동안 이고 지고 있던 꼭 필요한 짐마저 던져 버린 채 필사적으로, 남쪽으로 내닫던 가족들은 더 이상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할머니가 말씀하셨다고 한다. ‘너희들은 어떡하든 빨리 이곳을 벗어나 남쪽으로 달리거라. 늙은 나를 설마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할머니의 결단에 당시만 해도 20대 젊은 청년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누님 한 분만 업고 빨리 떠나라는 할머니를 눈물을 흘리며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피란길에 다시 올랐다고 한다. 

 

피란지이자 어머니의 성장지이기도 한 진천에 도착한 아버지는 일단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기에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생활전선에 뛰어 드셨고, 어머니는 누님을 돌보며 역시 아버지를 도와 생존의 대열에 나서야 했다. 그러기를 몇 달, 아버지께서는 마침내 진천군청에 공무원으로 취업하게 되면서 생활은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생활이 안정될수록 아버지는 평택에서 헤어진 할머니의 안부가 궁금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또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북에서 내려오는 피란민들을 수소문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할머니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안부를 묻곤 하셨다. 안타깝고, 그립고 죄스러운 마음에 밤잠을 설치기를 몇 달 동안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진천 읍내리에 한 피란민 여자 노인이 구걸을 하며 나타났다. 어머니는 대뜸 그분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보셨다고 한다. 바로 할머니셨다. 우리 가족과 할머니와의 극적인 상봉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외할머니와 친할머니는 그렇게 한방을 쓰시며, 친구처럼 지내셨고, 나는 휴전협정이 조인된 몇 해 후 태어났다. 그리고 진천에서 줄곧 성장하게 되었다. 두 분 할머니는 나의 어린 시절 성장과정을 지켜 보시며 생활하셨다.

 

전쟁터이기도 했던 진천에서 태어난 나는 각종 무기와 관련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때는 군인들이 학교 운동장에 수류탄 등의 불발탄을 전시해 놓기도 했고 절대 만지지 말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였다. 또 한번은, 6.25 전쟁 때 초가지붕에 박혀있던 박격포탄 불발탄이 지붕개량 사업을 하면서 지붕 밑으로 떨어지면서 폭발하여 골목길에서 놀던 친구의 동생이 유명을 달리하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6학년 때는 소풍지로 정해진 봉화산에서 선생님이 박격포탄 불발탄을 발견하시는 바람에 소풍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제 내 나이도 어느덧 일흔 가까운 나이가 되고 말았다. 나의 가족 중 친할머니, 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도 고향산천에는 다시 가 보시지 못한 채 모두 돌아가셨다. 6.25전쟁으로 인해 막힌 휴전선은 아직도 견고하고 남북의 대치상황은 여전하다. 6.25를 다시 맞이하며 같이했던 가족이 가슴에 사무치게 그립다. 그리고 통일된 나라에서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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